<파리 프랭땅 백화점> 유럽 백화점이 공간혁신을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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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백화점 업계가 공간혁신을 위한 적극적인 리노베이션에 나섰다. 경기침체와 온라인 쇼핑 확대 등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경험요소와 테마형 전문관 도입을 확대하는 등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유럽의 백화점도 최근 오프라인 리테일 업계에 불어 닥친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패션 도시인 뉴욕을 비롯해 런던에서도 굵직한 리테일러들이 문을 닫았고, 국내사정 역시 몇 곳의 백화점이 폐점됐거나 앞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백화점은 소비자가 전자상거래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변화된 라이프스타일 취향과 경험 마케팅에 초점을 맞추는 대대적인 공간변화가 필요했다. 

최근에 유럽 백화점이 리뉴얼을 강행하는 이유도 바로 공간혁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간혁신으로 새로운 쇼핑환경을 꾀한 리테일러들 중 한 곳이 파리 프랭땅(Printemps Haus smann) 백화점이다.

프랭땅은 1865년에 설립이후 엘리베이터와 전기 조명 그리고 지하철 연결을 시도했던 최초의 백화점이기도 하다. 몇 차례 화재로 위태로운 시기도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리뉴얼하고 건물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75년에 프랑스 정부는 프랭땅 건물을 역사적인 기념물로 등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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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땅은 아르누보 건축양식으로 독특한 큐폴라(돔)와 매력적인 외관만큼 쇼윈도 연출도 독창성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건물자체가 문화재인 프랭땅 백화점, 그 중에서도 옥상 테라스는 탁 트인 공간에서 파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꼭 둘러보라고 강력 추천하는 곳이다. 

프랭땅 백화점은 이렇게 다양한 매력과 특색을 갖추었지만 빠르게 변하는 소비 트렌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남성관과 뷰티, 리빙관을 전면 리뉴얼했고, 여성관은 일부 리뉴얼 중으로 3개의 건물 모두 공간 혁신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플랫폼을 시도한 럭셔리 온라인 채널 

프랭땅 백화점은 바로 옆에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이 위치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구도이다. 라파예트와 프랭땅은 시즌마다 독창적인 쇼윈도 연출로 소비자에게 감동을 준다. 2020년 2월의 프랭땅 백화점 쇼윈도 연출은 시즌연출이 아닌 프랭땅의 새로운 럭셔리 온라인 채널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알렸다. 

쇼윈도에 연출된 내용은 럭셔리 패션 전용 전자상거래 공간과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혁신적인 온라인 판매 사이트인 ‘Printemps.com’을 소개하고 있다. 프랭땅은 디지털 혁신을 위해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브랜드를 독점적인, 잡지 형식의 콘텐츠로 디지털에 배치하고 다양한 무료 문화예술의 공유공간으로서 온라인 고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Printemps.com은 쇼윈도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사이니지를 통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온라인 채널을 오프라인에서 흥미롭게 전달했다. 

디지털 사이니즈에서는 인스타그램에서 캐스팅한 다양한 연령, 성별, 신체를 가진 참가자들을 차별 없이 보여주며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소개하고, 의상과 얼굴을 쇼윈도에 복사하듯 연출해 지나가는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전세계 코로나19로 오프라인 공간에 거리를 두는 요즘, Printemps.com은 다양한 고객층에게 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트렌드를 전달하는 채널로 자리를 잡아가며 장차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남성관 7층에 식품관을 오픈한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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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리뉴얼을 마친 남성관(Printemps de l’ Homme)은 브랜드 경험중심 공간과 매력적인 비주얼 머천다이징으로 고객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남성패션과 특색 있는 매장들을 층별 둘러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공간을 발견한다. 식품관이 남성관에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식품관이 7층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식품관은 대체적으로 지하층에 배치된 사례가 많다. 국내에서도 백화점의 자존심이자 얼굴인 1층을 명품 브랜드나 뷰티 공간으로 고급스러운 백화점 이미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최근 소비패턴의 변화를 반영해 식품매장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유통채널이 증가하고 있다. 식품관을 통째로 1층으로 올려놓은 백화점이 있는가 하면 식음료(F&B)매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증가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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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땅 식품관>

프랭땅의 식품관(Printemps du Goût)은 고층에 꾸민 최초의 백화점 사례이다. 특히 식품관팀은 프랑스 전역을 다니면서 장인들을 만나 셰프, 100% 프랑스에서 생산, 제조된 식재료를 식품관에 집결시켰다. 이러한 식재료로 완성된 식품관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 풍경을 조망하며 미식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7층 식재료관에서는 프랑스 요리를 해보고 싶을 만큼 고급스러운 다양한 식재료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의 대표 와인과 샴페인은 빠질 수 없는 쇼핑 품목이며 디저트인 초콜릿과 마카롱, 과자류와 주방용품까지 주방의 모든 재료들을 원스톱 쇼핑으로 즐길 수 있다. 식품관의 특별한 공간인 서점코너는 요리책과 샴페인, 빈티지 와인, 유기농 와인과 맥주를 포함한 1.500여 권의 참고문헌을 비롯해 전문 요리관련 서적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다.

왜 프랭땅은 식품관을 지하도 아니고 1층도 아닌 7층에 올렸을까? 몇 년 전만해도 프랭땅의 식품관은 2층이었는데 건물 자체를 남성관으로 리뉴얼하면서 전망이 가장 좋은 위치에 식품관을 올린 것이다. 

소비자는 식재료를 쇼핑하면서 파리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자연채광까지 누릴 수 있는 이 같은 식품관을 오래토록 바라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식품관을 7층에 꾸며 배치한 프랭땅의 사례는 프랑스는 물론 해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함을 준다. 더욱이 도시풍경을 바라보며 차나 식사를 즐긴다면 한층 차별화된 고객의 경험공간과 장소가 될 것이다.

 

파리지앵 아파트 콘셉트의 메종은 무엇을 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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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땅 메종관​>

집은 개인의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외부로 연결되는 공간이다. 소비자는 집에 대한 공간인식의 변화로 생활 전반에 자신의 취향을 담은 특별한 일상을 꿈꾼다. 이러한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니즈는 백화점 리빙관의 다양한 혁신적 변화를 선보이게 한다. 프랭땅 메종관(Printemps de la Maison)도 대대적인 리뉴얼을 시도했는데 그 첫 단계가 남성관을 이동한 그 건물에 뷰티와 메종 그리고 아동관을 배치해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3층에 걸쳐 200개가 넘는 브랜드를 모은 뷰티관은 체험을 중시하는 공간전개로 뷰티를 위한 모든 서비스를 한곳에 집결시켰다. 명품 브랜드만의 고급스러움과 각 브랜드만의 창의적 공간들은 아름다운 피부를 위한 경험 장소로 충분했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한 메종관은 더욱 창의적이다. 파리지앵 아파트 콘셉트로 설계된 메종관은 사용자 친화적인 거실, 주방, 침실 3가지 테마로 구성돼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출과 체험공간으로 소비자를 유도한다.

리뉴얼은 실내 디자이너 ‘사라 라보(Sarah lavoine)’에게 맡겨 그녀의 생활 예술 코드를 공간에 담았다. 매장은 오크 헤링본으로 바닥을 마감하고 곳곳에 설계된 아치형 몰딩 구조물 그리고 긴 창문 설계로 자연채광을 강조한 방식은 아파트의 건축양식과 생활양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실처럼 구성된 2층은 아파트 복도와 비슷한 중앙 통로를 따라 배치한 긴 테이블에 생활용품을 감각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전개는 바로 긴 창문이다. 메종의 공간은 자연채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소비자로 하여금 밝고 따뜻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3층의 주방공간은 긴 창문에서 전해져 오는 자연광이 주방 용품들을 조명보다 빛나게 했으며 브랜드마다 독창적인 공간을 꾸며 소비자를 한참동안 머무르게 한다. 또한 4층은 린넨의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침구용품들을 마주하며 침구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이곳 공간 역시 자연채광으로 편안하고 스위트한 홈 분위기를 충분히 살려냈다. 

프랭땅 메종에서 가장 눈에 띈 비주얼 머천다이징은 동선에 긴 테이블 전개다. 이러한 동선 전개방식은 파리 유명 백화점과 런던 백화점에서 동일하게 확인된다. 보통 고객 동선은 시야 확보나 고객 편의로 집기 배치를 지양한다. 하지만 이러한 획기적인 연출성은 획일적인 백화점 환경에서 벗어나 고객에게 오프라인 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볼거리와 제품구성을 보여주기 위한 프랭땅 메종의 적극적인 시도이다. 

 

새로운 소비공간은 고객경험을 유도한다

장식예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업용 건물 중 하나인 프랭땅은 지속적인 리뉴얼로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쇼핑 경험을 제공해왔다. 리뉴얼을 대부분 마친 프랭땅의 공간을 보면 국내와 조금 다르다. 국내는 휴식 공간 및 경험공간을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고객이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 공간 전략을 시도한다면 유럽은 공간의 다양한 측면을 노출한다.

예를 들어 고객의 삶의 여정을 반영한 친화적인 공간이 그러하다. 백화점의 획일적 공간전개에서 벗어나 스트리트 마켓거리를 연상케 하는 독창성과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공간과 제품을 경험하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전략이 돋보인다.

프랭땅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가상공간인 온라인 채널을 통해 모든 연령과 신체 유형에 따른 모델을 세워 포용성과 다양성 및 환경, 책임성에 중점을 두는 등 프랭땅만의 차별화로 럭셔리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했다. 온라인 디지털 혁신에 이어 고객이 오프라인 스토어를 방문했을 때 독창적인 공간, 감성적인 체험, 미식여행 등 다양한 ‘경험과 인상’을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엿보인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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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일, 재미삼아 하는 일, 남을 돕는 일, 나 자신을 위한 일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된다. 일 하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분류로 나뉜다. 그러나 지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려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과 찾지 못한 사람’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한 사람은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직장을 다닐테고,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에게는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이 찾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 까지 벌수 있다면 최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로 돈까지 벌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패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극히 생소한 일이었다.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주변에 패션 디자이너나 패션 기업인도 잘 없다.

아마 패션 업체에 다니는 사람을 지인으로 두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패션을 업(業)으로 삼고 옷을 만들어 돈을 버는 패션 사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이 아니었다.

물론 이 다음부터 소개하려는 분들이 ‘아무나’는 아니었다. 혹자는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 10%의 노력과 90%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었다.

좋아하다 일이 되다

덕업일치라는 말은 생소했다. ‘오타쿠’라는 일본어는 한 가지에 몰두해 대인관계도 없이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하는 은둔형 외톨이(히끼꼬모리)와 맥을 같이한다. 이를 다소 부정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던 지라 이에서 파생된 오덕, 덕후, 덕질 이라는 단어들도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 분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전문가가 된, 어쩌면 누구보다 그 분야를 잘 아는, 그런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뜻의 ‘덕업일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미디어에서는 ‘덕업일치 란 없다. 그냥 상황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궁금증에서 출발한 취재는 빠르게 진행됐다.

여러 채널을 통해 이 같은 사람을 수소문했고, 어렵게 패션 관련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고 있는 몇 명의 덕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이를 사업화하고, 플랫폼을 만들고 있으며,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임몬타나의 최영훈 대표, 와디의 신발장 유튜버 고영대,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 유니페어 강재영 대표 등 덕업일치를 이룬 덕후들을 만나봤다.

그들은 어떻게 덕업일치를 이뤄냈을까.


안경 수집 덕후, 안경을 만들다

‘프레임 몬타나’ 최영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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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8만 팔로워를 거느린 최영훈 대표(이하 몬타나최)는 패션과 관련 제품들을 수집하는 덕후였다. 옷을 좋아해서 코치넬리 등 이태리 유명 브랜드는 물론 안경, 시계, 나이키 운동화 등 출장을 다니며 여러 제품을 수집했고, 그 제품들을 보면서 공부했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에 2년 간 근무하다 회사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 MBA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경영컨설팅을 하다 케미칼 회사를 차렸다.

몬타나최는 안경을 좋아해 1920년 대 출시됐던 빈티지 안경테부터 여러 클래식 뿔테들을 수집했다. 수많은 레퍼런스를 모으고, 아름다움을 배우고, 느끼면서 미적 감각을 키웠다. 수집이 힘이 됐다. 좋아서 모으기는 했지만 안경을 만드는 데는 전혀 지식이 없었다.

케미칼 사업은 매출 규모는 커도 수익률이 그리 높지 않아, 큰돈을 만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새로운 사업을 고민하던 중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업의 시작이 되었다.

아이템을 고민하다 보니, 옷도 너무 잘 만드는 브랜드가 많아 자신이 없었고, 신발도, 액세서리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안경이 떠올랐다. 내가 쓰고 싶은 안경을 찾아봐도 클래식하고 빈티지한 전문 브랜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은 재고 문제도 있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경은 10년 넘게는 클래식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계속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도 많이 안 들고. 현실적으로 기존 브랜드들과 차별화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몬타나 최는 자신이 직접 안경을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한 후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는 연결 고리 하나 없이 일본 안경 생산의 메카인 후쿠이현 사바이 시에 메일을 보내 안경 제조 업체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몇 개 업체를 소개 받아 직접 방문했다. 프로토 타입 제작을 맡겨 가장 잘 만든 업체를 선정하고 제품 생산을 맡겼다.

그는 “운이 좋았다. 선택한 업체가 사기꾼이었다면 프레임몬타나는 지금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정직한 업체였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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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칭 당일 3억원 매출

이렇게 만들어진 안경 브랜드 ‘프레임몬타나’는 그 행보 자체가 놀라웠다. 론칭 당일,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3억원 어치 제품이 팔려나갔다. 30만 원 상당의 제품 1천 개가 24시간 동안 판매됐다.

프렌치 스타일 안경테 ‘크라운 판토’는 안경 윗부분이 각이 진 제품인데 현재 대부분의 안경 브랜드가 이를 따라한 제품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프레임몬타나’는 순식간에 유명 브랜드가 됐고, 60개 안경점에 입점했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프레임몬타나의 종이안경 서비스. 안경의 경우 써 보지 않고 구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종이로 안경 모형을 만들어 원하는 고객에게 보내주었다.

고객은 종이 안경을 자신의 얼굴에 대보고 원하는 제품을 골라 온라인에서 주문하는 방식이다. 종이 안경은 모두 고객에게 제공한다. 이는 순수하게 프레임몬타나 팀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서비스가 단번에 높은 매출을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몬타나최’의 안경 사랑은 비즈니스가 됐다.


프랑스도 인정한 토종 브랜드

몬타나최는 프레임몬타나의 준비 과정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두 공개했다. 어떻게 브랜드가 만들어지는지 공개하는 것은 다소 리스크도 있었지만 재미 있는 정보를 팔로워들에게 제공했다.

처음부터 팔로워들을 비즈니스 모델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채널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팔로워들은 점점 늘었고 그들에게 더 많은 정보들을 제공했다.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 결과 사진을 찍는 것조차 싫어했던 그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가 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SNS를 통해 비즈니스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두 달 전 프랑스 안경 전시회 ‘실모(SILMO)’에 참여해 전 세계 안경 전문가들로 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실제로 전시회에 참여하는 안경 브랜드들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작은 신규 브랜드가 빅이슈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프레임몬타나는 유럽 지역 5개 유명 안경 셀렉숍에 입점하게 됐다.

최영훈 대표는 “안경으로 유명하지도 않은 나라의 작은 브랜드가 이런 반응을 얻은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글로벌 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프레임몬타나는 유럽 에이전시를 두고 영업망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하우스 비즈니스에서 진짜 기업으로

프레임몬타나는 처음 12개 모델로 시작했다. 지금은 15개로 늘었다. 선글라스 1개를 포함하면 16개. 내년에는 17개로 늘리고 티타늄 모델도 3개를 추가한다. 스타일 수를 늘리고 하우스 브랜드의 느낌을 살려 고가로 전개한다.

이와는 별도로 세컨 브랜드를 론칭한다. 가격대를 합리적으로 책정해 좋은 안경을 더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물론, 돋보기 안경, 캐주얼 안경 등 약 200개 정도의 스타일을 구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 달 중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한다. 모인 자금으로 프레임몬타나주니어(가칭)을 론칭해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물론 온라인도 병행한다.

최근에는 킥스몬타나 브랜드 사업도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모아온 나이키 빈티지 스니커즈를 판매하고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제품들을 프레임몬타나와 함께 전시했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나이키 마니아들이 몬타나최를 찾아오고 있었다.


쉽지 않은 덕업일치

어려움도 있었다. 혹자는 먹고 살만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모으다가,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돈을 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물론 아이템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했지만 ‘잘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했다. ‘프레임몬타나’가 망했다면 자금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가 좋게 나와 다행이다. 덕업일치로 사업이 될지 전혀 몰랐다.

5년 전만해도 월급쟁이였다. 빨리 승진하고 사장이 되고 싶은 우리 세대의 가치만 쫓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삶이 180도 달라졌다. 성공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와 자신도 빨리 성공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도 좋아하는 일을 찾는 데 20년이 걸렸다.

너무 조바심내지 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재밌게 하다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다. 덕업일치는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덕업일치를 이루고 행복 지수가 높아졌다고 한다. 마지못해 밤을 새던 직장생활과 비교하면 지금은 밤을 새서 일하더라도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자신의 라이프가 훨씬 나아졌다며 웃음을 보였다.


신발 덕후, 스니커 마니아들의 장(場)을 만들다

‘와디의 신발장’ 유튜버 고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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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디, 휠라를 만나다 >

스니커즈 마니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 스니커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알려진 유튜버가 있다.

와디의 신발장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유튜버 고영대 씨(이후 와디)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이다. 내부 조직과 외부 조직을 연결하고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드는 일을 한다.

어려서 부터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금도 회사에서 판을 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그의 방송은 재미있고 신선했다.

신발 덕후가 만든 스니커즈 팬덤

와디가 자신의 본업 외에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것은 단지 신발을 좋아해서 이다. 자신이 관심있는 내용들을 영상에 담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발에 대한 영상만 조회수가 높게 나왔다. 이에 아이디어를 얻은 와디는 채널 이름을 ‘와디의 신발장’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신발 방송을 시작했다.

영상학을 전공해 영상 편집도 빠르다. 그의 영상에는 효과도, 텍스트도 없다. 영상만이 있을 뿐이다. 17분을 찍으면 15분 영상을 올린다. 숨소리만 편집해서 내보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운동화 밑창을 닳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는 ‘슈구’ 사용법부터 시작해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했다. 자신이 모은 신발은 300족, 새것은 100족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신발들을 리뷰를 하면서 스니커즈 마니아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아 지금 구독자수는 10만을 훌쩍 넘었다.

와디가 지금까지 올린 영상은 1천개가 넘는다.

그는 퇴근하고 아이들을 재운 10시가 넘으면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신발을 영상에 담아 올리는데 까지 1시간을 투자한다. 주말에도 가족과 함께 하고 남는 시간에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스니커즈 전문가로 유명해 지자 여러 비즈니스적인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디는 어렸을 적 부터 좋아했던 싱가포르의 나이키 외주 디자이너 사포타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만나 협업을 제안했다. 함께 옷을 만들고 이를 판매한 수익은 기부했다.

&lt;지난 11월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스니커 매니아들의 행사 ‘스니커하우스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단체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Photo 스택하우스&gt;

<지난 11월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스니커 매니아들의 행사 ‘스니커하우스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단체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Photo 스택하우스>

스니커즈 행사에 3천 8백명 몰려

현재 국내에는 이렇다할 스니커즈 행사가 없다고 한다. 해외에는 컨플렉스콘, 스니커콘 등 마니아들이 참여해 리미티드 제품을 구경하고 이를 즐기는 행사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국내에도 스니커즈 마니아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기획하기에 이른다.

와디는 구독자가 3만에 달했을 때 자신 혼자 직접 조금씩 돈을 모아 행사를 기획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장소를 제공하기로 했던 업체와 틀어지면서 행사 개최는 물거품이 될 뻔했다. 그 때 미국에서 국내에 스니커즈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 넘어 온 스택하우스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와 함께 하자” 와디는 스택하우스와 손 잡고 ‘스니커하우스’라는 행사를 만들었다. 강남에서 열린 첫 회 행사에는 300명이 왔다. 이 후 입소문이 퍼지면서 늘어나기 시작해 4차 행사에는 3천 8백 명의 마니아들이 몰렸다.

올 해 용산에서 연 스니커하우스 번외편 캠프에도 2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렸다. 여기서는 청주 크래프트 비어 브랜드 칠홉스와 협업해 이 행사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수제맥주를 신발 박스에 넣어 판매했다. 바로 완판. 수익금은 기증했다.

스니커하우스 3차 행사때 특수 염료 회사와 손잡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얼굴 문양을 넣은 티셔츠를 만들었다. 빛을 받으면 얼굴 문양이 빨갛게 바뀌는 효과가 있다. 물론 40분 만에 완판했다. 수익금으로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20만원 상당의 나이키 운동화를 돌렸다.

국내에도 유명 스니커즈마니아 행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규모로는 일본의 아트모스콘을 압도했다. 스니커하우스에서는 희귀 스니커즈를 전시하고, 리셀러들은 제품을 팔며,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다. 스니커즈 인디 브랜드도 참여하는 스니커즈와 스트리트 문화를 공유하는 행사이다.

와디는 이 행사에서 공개방송도 진행하고 스니커즈를 주제로한 토론과 토크쇼도 진행해 이목을 끌었다.

와디는 “실제 미국의 컴플렉스콘에는 굉장히 많은 브랜드의 협업 제품이 출시된다. 그 곳에서만 판매하는 제품을 구경하고 사기위해 마니아들은 하루에 80달러를 내고 들어간다. 물론 제품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의 시작, 휠라와의 만남

휠라의 제안을 받은 와디는 흔쾌히 승낙했다. 휠라와 와디의 협업 소식은 스니커즈 마니아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휠라는 와디에게 휠라의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아카이브를 모두 보여주었고 와디는 그 중 자신이 원하는 소재와 색상을 제안했다. 휠라는 이를 바탕으로 협업 제품을 만들었다.

수량은 단 100족. 와디의 주문 사항이었다. 이 제품은 휠라 플래그십 스토어 한 군데, 공식홈페이지, 무신사를 통해서만 판매됐다. 휠라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출시 전날 밤 12시 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 발매 즉시 50족 모두 완판, 무신사와 공홈에서는 50족이 1초만에 완판됐다.

와디는 휠라 매장 앞에 마니아들을 줄 서게 했고, 희소성을 극도로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이 제품의 가격은 6만 9천원. 발매 다음 날 리세일 시장에서 세 배가 넘는 15만원에서 많게는 20만원 상당의 가격으로 거래 되었다고 한다.

와디는 휠라와의 협업에 대해 “마니아가 할 수 있는 덕질의 끝을 경험했다. 행복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와디는 스니커즈 전문 서적도 출간했다. 국내 유명 스니커헤드 10명과 함께 스니커 100선을 담았다. 와디는 일본에 갔을 때 서점에 들렀다 큰 충격을 받았다. 서점 한 벽면 책장이 모두 스니커즈 관련 책 이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스니커즈 시장이 작지 않은데 왜 전문 서적이 없을까 생각하다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하고 국내 처음으로 스니커즈 관련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마니아들에게만 팔렸지만 마니아들은 이 책을 쓴 스니커헤드를 만나 책에 사인을 받기도 하고 그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와디는 휠라와 두 번째 협업도 추진 중이다. 시점과 방법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

&lt;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국내 유일 스니커즈 행사 스니커 하우스&gt;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국내 유일 스니커즈 행사 스니커 하우스>

덕질로 번 돈, 좋은 일에 쓰기

와디는 자신의 유명세로 번 돈을 좋은 일에 쓰고 있다.

와디는 스니커하우스 행사에서 자신의 신발 중 제일 비싼 것을 내놓아 경매 수익금으로 운동화를 구매해 고아원의 중고 남학생에게 선물했다. 고아원 한 아이당 일 년에 신발 구매 비용은 약 10만원 정도라고 한다. 와디는 나이키 조던맥스, 아디다스 울트라부스트 등 고가의 제품으로 전부 다른 모델에 색도 모두 다르게 사줬다.

이 후 프랑스 패닉피자클럽 이라는 브랜드에서 연락이 와 함께 제품을 만들어 여자아이들 것도 사주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제품 역시 하루만에 품절됐다. 그 수익금으로 초등학생까지 모두 사주었다.

운동화를 구매할 때도 온더스팟, 아트모스 같은 온라인 스토어에서 50% 할인해 주면서 더 많은 제품을 고아원 아이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에서 60만원 상당의 패딩 4개를 증정해줘 지난 달 30일 증정식을 가지기도 했다.

“좋은 기운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의 고아원에 다른 이벤트로 수익을 내 또 좋은 운동화를 주고 싶다. 내가 특별히 들이는 것 없이 마니아들은 굿즈를 구매해서 좋고 아이들도 좋고 서로서로 좋은일 인 듯하다”


와디는 회사일도 즐겁게

와디는 회사일도 즐겁게 한다. 양쪽일 모두 만족하면서 자아실현도 하고 있다. 유튜브도 재밌고 회사일도 좋다. 주말에는 행사와 파티에 참석해 힐링하고, 독자들과 스니커즈 브랜드가 보내주는 신발은 하루에 하나씩 택배로 온다.

한 가지 고민은 지금처럼 두 가지 일을 함께 해야 할지 유튜버와 행사 기획에 집중해야 할지다.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를 업으로 할 경우 수입에 대한 스트레스로 스니커즈에 대한 열정이 식을 수도 있을까 걱정도 되기 때문이다.

미국 컨플렉스 스니커 채널은 음악과 스니커즈를 엮어 새로문 문화 채널을 만들고 있다. 와디는 우리나라의 멋진 장소와 함께 스니커즈를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구독자들의 반발 없이 방송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을 항상 고민한다.

와디는 “옷이든 신발이든 내가 소개하는 제품들은 나만의 굿즈일 뿐이다. 문화를 움직이는 브랜드가 될 수는 없다. 내 역할은 스니커즈 전문 브랜드를 응원하면서 함께 만들고도 싶고, 스니커즈 시장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국내에서도 아이앱스튜디오, 99%is, 피스 마이너스원 등 같은 브랜드들이 많이 나와서 함께 스니커즈 시장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부산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세계의 편집숍에 입점하는 그런 세상을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자전거 덕후, 바이크웨어를 만들다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

&lt;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가 자신이 매일 타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가 자신이 매일 타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한 자전거 덕후가 바이크웨어를 만들었다.

그 주인공은 아덴바이크를 만든 안형선 대표다. 안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스포츠 마니아였다. 인라인, 자전거 등 운동을 좋아해 남들 공부할 때 운동을 했다. 오클리 선글라스도 좋아했다.

당시 국내에 오클리 선글라스가 판매되지 않고 있어 이 제품을 수입해 알음알음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 개를 팔면 7~8만원이 남았다고 한다. 판 돈으로 두개를 사고 두개 팔아 남은 돈으로 또 5개를 사고, 그러면서 월 수익은 100만원을 넘었다.

처음에는 중고로 사서 판매하다 오클리 선글라스 수입 업체를 직접 찾아가, 판매 대행을 요청했다. 업체는 흔쾌히 제품을 공급해 주었고 안 대표는 선글라스를 인터넷 오픈마켓에 팔며 종잣돈을 모았다. 안 대표가 이를 잘 팔자 오클리 미국 본사에서 연락이 와 직접 팔아달라고 했고, 더 큰 사업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사다

대학교 때 번 돈으로 비싼 자전거를 구매했다. 그 나이 또래에 살 수 없는 MTB 자전거를 사서 실컷 타고 다녔다. 이후 자전거 용품, 미국에서 유행하는 디스커버리, 나이키 등 팀복을 사다 팔았다. 팀복은 뜨루드 프랑스, 레플리카 등 선수들이 입는 옷이다.

섬유공학을 전공한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원단 회사에 들어갔다. 원단 회사에서 갭, 올드네이비, 신성통상, 이랜드, 리바이스 등 다양한 기업과 거래했다. 회사생활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월급도 작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3년 쯤 다녔을까.

안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새벽 3시까지 병행 수입 일을 하면서 내 사업을 위한 돈을 모았다. 매월 1천만 원씩 벌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돈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보람이 없었다. 내 일을 내가 직접하면 효율적으로 내 시간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쓰러질 때까지 밤새 일해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자전거. 그러나 자전거 옷은 입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는 예뻣지만 너무 비싸고, 국내 브랜드는 기능성이나 디자인 면에서 많이 떨어졌다.

자전거를 직접 하면서 어떤 옷이 편한지 알게 됐다.

&lt;안형선 대표가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안형선 대표가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공장을 찾아가다

처음에는 원단 밖에 몰랐기 때문에 패턴이나 공장이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무작정 봉제 공장을 찾아가 옷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시도 많이 당했지만 갖고 있던 돈을 먼저 주고 만들어 달라고 했다.

스타일을 처음에는 2개, 6개, 10개 계속 늘려 나갔다. 수입 사업으로 번 돈을 제조에 투자했다. 1스타일을 소량으로 몇 백장만 만들어도 2천만 원 넘게 들었다. 제품은 직접 활동하던 동호회나 마니아들 위주로 팔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함께 했던 커뮤니티에서도 잘 팔렸다.

국내 판매 제품들은 패션을 무시한 멋이 없는 옷들 뿐이었다. 직접 디자인하고 내가 자전거 타면서 입고 싶은 옷을 만들었다. 원단도 직접 개발했다. 매쉬 원단, 라미네이트필름, 안감 스판트리코트 원단을 붙여 합복을 하는 등 원단을 만들고 봉제공장도 인수해 직접 만들어 원가를 대폭 낮췄다.

패턴도 입체패턴을 적용했다. 자전거 탈 때 자세에 맞춰 팔은 꺾이고 앞판은 울지 않게, 어깨도 안으로 굽어지게 만들었다. 바지 안에 들어가는 패드도 다양하게 수입해 공급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불편한 옷, 자전거 탈 때는 세상 편한 옷이 만들어졌다.

품질은 높이고 단가는 낮추니 자전거 마니아들이 몰렸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드니 고객들도 좋아했다. 내 맘에 안 들면 다른 사람도 안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바이크 마니아 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내 브랜드 중 가장 많이 팔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바이크웨어로는 1등

안 대표는 자전거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도 자전거를 꾸준히 타고 있다. 도로사이클 연맹 같은 조직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조직원들과, 직원들도과도 주기적으로 자전거를 탄다. 매일 아침 40km 씩 자전거를 탄다.

마케팅도 쉬지 않는다. 공식적인 크루를 모집해 연간 300백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 MCT선수들과도 스폰서십을 맺고 옷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내년에는 큰 차를 빌려 자전거 전국 일주도 계획하고 있다.

매장도 열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무조건 자전거 길에서 옷을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 주변에 매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직영점으로 운영하다, 자전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둘씩 대리점으로 운영권을 넘겼다. 그들이 비수기에 매출이 줄어들까 여러가지 아이템도 지원해주고, 커피 등 음료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나만 잘 살기보다 점주들도 돈 잘 벌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대표는 올해 프리미엄 브랜드 ‘치즈 사이클링’을 인수했다. 고급 소재를 사용하고, 디자인도 차별화했다. 인수와 함께 ‘치즈 사이클링’을 론칭했던 멤버도 함께 데려왔다. 그 역시 자전거 덕후이며, 홍대 아티스트 출신이었다. 자전거 웨어에 스트리트 감성을 접목해 독특한 디자인으로 마니아층을 흡수하고 있다.

&lt;안 대표가 자전거 덕후인 직원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안 대표가 자전거 덕후인 직원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직원들도 모두 자전거 덕후

어느 날 한 직업 군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군생활을 그만두고 미국에 가 LA부터 뉴욕까지 자전거 횡단을 하겠다며 옷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안 대표는 옷을 줬고 그는 정말 몇 만 km 거리의 미국을 횡단했다고 한다.

중간 정도 갔을 즘 그는 안 대표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내가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돌아오면 내가 채용해 줄테니 완주하고 돌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 직원은 지금까지도 근무하고 있으며 바이크 선수생활을 하면서 아덴바이크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것도 중요하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그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안 대표의 판단에서 였다. 안 대표는 주말에는 무조건 직원들과 자전거를 타고, 만나는 사람들과 제품을 이야기 하고 건의 사항은 언제든지 제품에 반영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해외 사업도 시작

자전거 웨어 외에 병행 수입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 오클리, 루디 등 을 수입해 판매하고 올 해는 스노우고글도 직접 제조해서 판매할 계획이다. 미국 법인도 세웠다.

과거 수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 법인에서 직구로 국내고객에게 판매하면서 다양한 이점을 가져간다. 판도라, 샘소나이트, 어그부츠 등을 파는 재미도 솔솔하다.

미국 거래량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등 해외 지역에도 디스트리뷰터를 두고 옷을 팔고 있다. 해외 각지에 디스트리뷰터도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계약한다. 대만 친구들은 매년 한국에 와서 부산 서울 까지 함께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CD가 나오면서 카세트가 사라지고 MP3가 나오면서 CD가, 모바일이 나오면서 MP3 사라지지만 자전거는 오토바이, 자동차, 전기 자전거가 나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자전거를 타겠죠. 스노우보드는 어느 정도 보드를 타다 나이가 들면 못타지만 자전거는 나이가 들어도 힘들이지 않고 건강을 지켜주는 좋은 친구 입니다”

자전거 덕후는 그렇게 옷을 만들고 있었다.


클래식 덕후, 클래식이여 영원하라

유니페어 강재영 대표

&lt;강재영 대표. photo 모지웅 기자&gt;

<강재영 대표. photo 모지웅 기자>

옷차림도, 생활 방식도 점점 더 캐주얼해지는 요즘 시대, 어렵게 만들어진 값비싼 신발이 굳이 필요할까요? 그러나 ‘제대로 된 좋은 구두’를 신는다는 것, 일종의 문화를 지키는 태도이자 낭만을 표현하는 세련된 방식과도 같습니다."

"만약 특별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만찬에 격식을 갖춰 입고 신고 간다면, 동행한 상대방은 물론 스스로도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상황에 맞게 입고 신는 태도는, 남자의 일상에 남겨둬도 괜찮은 규율이자, 기분 좋은 우아함입니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고객이 아니라 문화를 동경

신사동 가로수길 안 쪽 골목, 화려한 쇼윈도와 큼지막한 간판이 걸린 주변 매장과는 눈에 띄게 다른 매장이 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블루(엄밀하게 로열 블루)도어가 마치 뉴욕 5번가의 레드도어 살롱을 연상시킨다.

이 곳은 브랜드명 그대로 ‘당신을 위한, 세상에서 단 한 켤레뿐인 구두’를 선보이는 정통 클래식 슈즈 숍 ‘유니페어’다. 에드워드 그린, 존롭, 알든, 파라부트 등 세계적 명성을 가진 수제화와 함께 한국인의 발 모양에 맞춰 자체 제작한 구두, 슈케어 브랜드 ‘릿슈’로 구성되어 있다.

강재영 대표를 만나러 간 날(지난달 29일)에는 마침 영국 최고의 비스포크 슈트 메이커 ‘앤더슨 앤 쉐퍼드(Anderson & Sheppard)’와 비스포크 슈즈 ‘에드워드 그린(Edward Green)’의 합동 트렁크쇼가 열리고 있었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양복’으로도 잘 알려진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cutter)가 예약 고객을 위해 체촌, 가봉을 하고 ‘에드워드 그린’의 MTO, 탑 드로어(Top Drawer), 기성제품 사이즈 오더를 진행하는 행사. 커터가 6개월에 한 번 방문해 2~3차례의 가봉을 해야 하는 까닭에 ‘앤더슨 앤 쉐퍼드’의 슈트 한 벌을 입기 위해서는 최대 1년 반을 기다려야 한다.

&lt;강재영(사진 제일 왼쪽), 강원식 형제가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강재영(사진 제일 왼쪽), 강원식 형제가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진한 싱글 몰트 위스키 향이 가득한 속에 전신 거울 앞에 선 멋쟁이 고객과 체형을 세심하게 체크하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커터. 1년이 넘도록 옷 한 벌을 짓고, 기꺼이 인내하겠다는 그들의 모습은 꽤나 멋있으면서 또 생소했다. 기성복 중에서도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 유명한 브랜드가 적지 않은데 말이다.

강 대표는 “만 11년 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슈트 문화를 알아야 (구두까지) 비로소 클래식 스타일을 즐기고, 갖춰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판매장이 아니라 클래식의 로망이 묻어나는 공간, 이런 문화를 이해하고 향유하고자하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자는 거죠.”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유니페어’는 근대 복식의 원류(源流)이자 클래식 문화의 중심에 있는 유럽의 브랜드를 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번 합동 트렁크쇼도 몇해 전 강 대표가 영국에 찾아가 슈트를 맞추면서 비즈니스 제안을 했던 결과다. 물론 한 번에 협업이 이뤄진건 아니다.

“경험을 해보고 확신이 서면 제대로 전달할 수 있죠. 클래식 슈즈를 공부하려면 슈트를 모를 수가 없어요. ‘앤더슨 앤 쉐퍼드’도 경험해 보는 것이 최고의 학습이라고 생각했죠. 처음엔 그들이 한국에서 뭘 해보겠다는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저희와 먼저 거래를 시작한 ‘에드워드 그린’이 역할을 해줘서 올 1월 삐띠워모에서 만나 뜻을 모았습니다.”

강 대표는 경제적 여유가 클래식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유일 조건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알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속에 경제적 여유는 윤활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은 어떻게 ‘클래식’에 빠졌고, 대박을 기대할 수 없는 시장에서 10년이 넘게 사업을 이어오고 있을까. 강재영 대표는 2008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일 치르꼬’라는 남성용 구두 전문 편집숍을 냈다.

처음에는 가장 먼저 출근해 진열되어 있는 구두를 닦는 일이 그의 업무였다. 2011년 ‘유니페어’로 리뉴얼했고 인큐베이팅한 브랜드 중 ‘드레익스’와 ‘파라부트’는 각각 서울 도산, 한남점을 오픈했다.

올 4월 광주광역시에 생긴 두 번째 ‘유니페어’ 매장은 매니저를 지낸 김해룡 대표가 고향에서 경험과 뜻을 펴 보겠다고 해 열게 된 매장이다.


‘함께 즐거운’ 일을 찾은 형제

강재영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코리아에서 마케터로 일하다 남성용 구두 전문 편집숍 ‘일치르꼬’를 창업하며 패션업계에 뛰어들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와 ‘일을 저지르는게’ 된 데에는 형인 강원식 코넥스솔루션 대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코넥스솔루션은 국내에 ‘착한 패션, 착한 소비’ 바람을 일으킨 슈즈 ‘탐스’를 도입했고 그라미치, 유니버셜 오버롤즈, 와일드씽즈 등 마니아층이 탄탄한 브랜드를 소개해 온 회사. 올 여름에는 형제가 함께 포토저널리즘의 효시가 된 매거진 ‘라이프’의 서브 라이선시로 제조업에도 도전했다.

강 대표는 “함께 좋아하는 것을 해왔다”고 이야기한다. 브랜드 스토리와 퀄리티에 호감이 생기면 제품을 먼저 사서 입거나 신어 보고 사용하면서 ‘공부’를 먼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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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부터 형과 함께 ‘나이키 에어조던’ 시리즈를 모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 ‘나이키 덕후’였고,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나가 ‘맨즈논노’를 구해 보면서 ‘우리에겐 왜 이런 멋진 남자 옷이 없을까’ 아쉬워했던 것이 사업으로 이어졌다는 설명.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덕질은 느리지만 차곡차곡 영글고 있다. ‘유니페어’는 신세계인터내셔날 자사몰인 ‘에스아이빌리지’에 입점한데 이어 올 가을 신세계백화점의 남성 편집숍 ‘맨온더분’과 손잡고 ‘유니페어 컬렉션’을 내놨다.

리테일러와 협업해 자체 개발한 첫 라인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의 발 모양과 그에 맞는 최적의 소재와 디자인을 적용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경영이 취미생활은 아니죠.” 안정적 수익구조를 만들었는지 물어 본 데 대한 강 대표의 답이다.

‘가치’가 인정받는 날을 기다리며

강재영 대표는 “우리 패션시장, 소비자가 진정한 ‘가치’에 호응하는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일을 할 수 있는 한 패션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유니페어’가 운명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유니페어’가 전하고 싶은 문화와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찾아 전개하면서, 브랜드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마저 명품이 아닌데 비싸다거나 사용기간이 짧다는 등 이유로 팔리지 않고 사라지는 현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공급자로서의 자기반성도 덧붙인다.

“종종 우리 사회가 진짜 가치를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브랜드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걸 바꾸지 않고 싶은데…. 싼 가격, 유명 브랜드를 쫓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치를 인식하는 수준이 높아졌으면 하는 거죠. 시장이 양극화되니 공급자들도 하나라도 더 팔리는 것만 찾고 정당하지 않은 방식도 불사하게 되지 않나, 돌아봤으면 합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