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미, 세계무대 주류 됐어도 나는 또 다시 도전 한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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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16구 센 강변에 있는 팔레 드 도쿄에서 우영미 디자이너(61, ㈜쏠리드 대표)의 2020 F/W 컬렉션이 열렸다. 

팔레 드 도쿄는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작품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전시하는 곳으로 유명한 현대미술 전시관이다. 이번 우영미 컬렉션은 처음으로 ‘우영미’의 여성복 라인을 선보여 특히 눈길을 끌었다. 

1월말 귀국해 2월 중순 세계 최대 원단 전시회인 프리미에르 비종(Premiere Vision Paris) 출장을 떠나기 전인 2월 6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본사 2층 접견실에서 우영미 디자이너를 만났다.  

80년대 중반, 후배 기자가 신진 디자이너 한명을 소개해 주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잠재력도 무궁무진해 보이니까 유심히 지켜보라면서. 

숏 커트 헤어스타일에 화장기도 거의 없어, 소년 같은 풋풋함마저 느껴지던 그 디자이너는 목소리가 조용조용하고 말수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패션을 화제로 얘기를 꺼내면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개 단답식으로 표현하지만, 그 안에 핵심이 다 들어 있었다. 

대기업에서 나와 몇몇 회사의 디자이너를 거쳐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초입에 ‘쏠리드옴므’라는 독립 매장을 차릴 무렵 그를 ‘유망한 신진 디자이너’로 인터뷰해 <월간멋>에 소개했다. 30여년 만에 다시 인터뷰이로 만난 우영미는 이미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우뚝 선 존재가 되었다. 그의 재능을 떡잎부터 알아보고 소개해준 사람은, 나중에 방송인으로도 유명해진 유인경 기자였다. 

세월이 많이 지나 그의 위상도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졌지만 숏 커트 헤어스타일의 수수한 모습, 말수가 적은 대신 핵심을 짚는 어투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신인 때 가졌던 패션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세계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점이 놀랍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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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 기념 패션쇼 백스테이지에서의 우영미 디자이너>

- 데뷔 32년 만에 여성복을 시도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옷에서 성(姓)을 구별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입는 옷도 그렇고, 내 딸들과 자매들은 일찍부터 ‘우영미’와 ‘쏠리드옴므’를 입었다. 거기에 ‘여성에 맞게’ 조금 변화를 준 것이 이번에 선보인 우영미 여성복 라인이다. 우영미 여성복은 기존 우영미의 또 다른 한 측면(another side)일 뿐이라면서 남녀가 서로 성을 바꿔서 ‘함께’ 입을 수도 있게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델들도 장발의 남성모델과 단발의 여성모델 등, 옷이나 모델의 모습만 보면 잘 구별이 가지 않도록 구성했다는 것이다.  첫 선을 보인 우영미 여성복에 대한 반응이 기대 이상인데, 이를 본 사람들은 그동안 ‘우영미’에 대한 해외에서의 존재감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고 했다. 우영미 여성복은 2020 F/W 시즌부터 서울과 파리의 플래그십스토어와 우영미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회사가 원하는 옷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옷 만들고 싶어서” 독립

1984년 어느 날, 필자는 보그지를 보다가 1983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 패션 어워드에서 한국 디자이너가 3등에 입상했다는 기사를 보게 됐다. 입상작은 한복을 모티브로 한 이브닝드레스였는데, 저고리 없이 치마만으로 이브닝드레스를 멋지게 연출한 옷이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프랑스의 티에리 뮈글러, 이탈리아의 미소니,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 등 쟁쟁한 패션 디자이너들이었다. 

수상자는 우영미.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한 뒤 반도패션(LF의 전신)에서 일하고 있던 입사 2년차의 신입 디자이너였다. 한국에서는 이 사실이 보도되지 않았고, 입상자인 우영미도 당시에는 자신의 기사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훗날에 기사가 났던 보그지를 그에게 주었던 기억이 난다.

행사 직후 이세이 미야케는 통역사를 통해 “나는 우영미 씨를 1등으로 채점했는데 아쉽다”고 극찬하면서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 있으면 일본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은 우영미 디자이너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대기업을 나와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ODM회사 뻬르마와 레드옥스를 거쳐 1988년 자신의 브랜드인 ‘쏠리드옴므’로 독립한다.            

뻬르마와 레드옥스가 모두 남성복 브랜드여서 우영미는 자연스럽게 남성복 디자이너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30여 년 만에 ‘돌고 돌아’ 다시 여성복을 하게 되었다며 웃는다.  

비교적 안정적인 패션기업 디자이너의 길을 마다하고, 대학졸업 6년 만에 독립한 이유를 묻자 대답이 간단하다. “회사가 원하는 옷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옷을 만들고 싶어서”라고. 

그가 대기업을 나와 잠깐 근무했던 뻬르마 회사에 들러 그가 디자인한 옷들을 본 적이 있다. 공군 항공 점퍼였는데, 소매선이 딱 한복의 풍성한 붕어배래였다. 서양인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했다. 한복을 특별히 공부한 적이 없다는데, 오사카 패션 어워드에서도 그랬듯이 우영미의 옷에서는 한국적 정서와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lt;2018년 10월 DDP에서 열렸던 2019 S/S 서울패션위크‘솔리드옴므’오프닝쇼. 그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우영미는 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됐다.&gt;

<2018년 10월 DDP에서 열렸던 2019 S/S 서울패션위크‘솔리드옴므’오프닝쇼. 그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우영미는 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무모한 도전, 그러나 끝내 성공한 파리 진출

데뷔한지 14년쯤 지난 2002년, 우영미는 파리 진출을 시도한다. 1993년에 디자이너 이신우와 이영희 등이 파리컬렉션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남성복 디자이너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영미 본인 스스로도, 전례도 없었고 어떻게 진출해야 하는지, 심지어 패션쇼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파리로 떠났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초창기 한동안은 엄청난 자괴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런 ‘무모한 도전’을 왜 했을까?

“외국의 명품 브랜드는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고, 무한 매출경쟁으로 백화점으로부터는 갑질 당하기를 수백 번 겪다보니 그런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텃세 세기로 유명한 파리 패션계에서, 아무런 네트워크나 인프라가 없던 동양인 여성 우영미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우영미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때의 선택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자괴감에 시달리면서도 힘든 도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든든한 지원군으로 막내 동생 故 우장희의 역할을 꼽았다.

‘쏠리드옴므’ 초창기부터 언니의 사업을 도운 우장희는, 우영미와는 성격도 상반된다. 언니가 학창시절부터 모범생 스타일로, 매사 꼼꼼하게 확인하고 추진하는 신중한 성격인데 반해 동생은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앞만 보고 돌진하는 추진력과 실천력이 강한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쏠리드옴므’를 시작할 때부터 사업적인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특히 파리 진출에 있어서는 우장희의 추진력과 돌파력이 큰 힘이 되었다.

파리 진출 초기에, 언니가 힘들어하면 “그럼 이제 와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갈거야? 왔으니까 끝을 봐야지!”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이끌어주던 동생이 2015년 7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우영미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후반에 유명을 달리한 동생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도 우영미는 눈가가 촉촉해진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겪은 그때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는 우영미. 이후 매일 명상과 108배를 하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연초가 되면 4백배나 5백배도 하지만 평소엔 108배를 하고 출장 등으로 108배를 다 못하면 36배로 줄여서라도 하고, 명상은 매일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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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팔레드 도쿄에서 가진‘우영미’ 2020 F/W 통합쇼.>

“매출보다 브랜드 가치가 더 중요하다”

 

- 파리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2002년 처음 진출한 뒤 10년쯤 지나 봉마르쉐에 매장을 오픈했을 때, 이어서 쁘렝땅에도 오픈하면서 나도 그랬고, 파리지엔들도 ‘이 회사는 쇼만 하고 돌아가는 곳이 아니구나’ 하는 인식을 하게 된 것 같다.”

- 2019년에 베이징과 상하이에 단독 매장 낼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쏠리드옴므’는 2015 F/W 시즌부터 중국 프랜차이즈 파트너를 통해 10시즌 동안 중국내 영업을 해왔고 ‘우영미’는 2014년부터 홍보회사와 손잡고 홍보하고 있다. 중국내에 ‘우영미’의 단독매장은 없고 파리컬렉션 기간 중 바잉하는 형태로 판매하고 있다. 중국에 단독매장을 내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있다.”

- 일본과 미국, 캐나다는 일본의 온워드 카시야마가 판권을 갖고 있다고 알려졌다.

“초창기에 잠깐 일본지역에만 온워드 카시야마가 판권을 가진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온워드 카시야마도 우리 옷을 구매하는 곳 중의 하나다. 미국과 캐나다는 통상적인 바잉 시스템으로 판매하고 있다.”

‘쏠리드옴므’와 ‘우영미’ 브랜드의 가장 큰 주안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포지셔닝’이라고 한다.   

‘우영미’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매 시즌 컬렉션을 소개하는 디자이너 라벨.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하이엔드 마켓, 럭셔리한 젊은 소비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쏠리드옴므’는 컨템포러리 남성복 시장의 영역에 속하는 브랜드로서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우영미’와 비교하자면 소비자층의 폭이 좀 더 넓다. 

하지만 두 브랜드 모두 매출보다 브랜드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우영미 디자이너가 데뷔 초부터 갖고 있던 자부심과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동안 ‘동양 여자가 만드는 서양 남성복’으로 파리 패션계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은 우영미는 파리의 저널리스트들이나 디자이너들로부터 “우영미의 옷에는 유럽의 명품 브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양적 섬세함과 우아함이 들어 있다”는 평을 들어왔다. 우영미 브랜드와 해외 유명 남성복 브랜드의 가장 큰 차별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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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팔레드 도쿄에서 가진‘우영미’ 2020 F/W 통합쇼.>

- 패션계에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는 SNS 마케팅 전략에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우영미’와 ‘쏠리드옴므’의 고객은 다 영맨이다. 내 옷의 소비자들은 백화점에서 구매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소통을 주로 휴대폰으로 하는 세대다. 파리에서 컬렉션을 하면, 내 옷에 대한 기사들이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그 정보를 SNS로 팔로워들에게 제공한다. SNS 정보제공은 마케팅팀에서 담당하고 있다.”

- 몇 년 전부터 뉴욕 패션위크에서 일부 디자이너들이 컬렉션 발표를 동시 중계하면서 판매하기도 한다. ‘컬렉션 발표 후 6개월 뒤 판매 한다’는 기존의 원칙이 깨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우영미 측의 대책은?

“홍보는 컬렉션 발표와 동시에 할 수 있지만, 옷 판매는 불가능하다. 원단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컬렉션 발표와 동시에 판매도 할 수 있을까? … 우리 시스템으로는 그렇게 못한다.”

쏠리드의 지난해 매출규모는 약 543억 원 정도. ‘우영미’보다는 ‘쏠리드옴므’의 매출비중이 높고, 해외보다는 국내의 매출규모가 더 큰 편이다. 최근 3년간 국내 매출이 60% 정도 성장해서 국내 매출규모의 비중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직원 수는 해외 직원을 포함해서 총 1백 여 명 정도 된다.  

우영미 디자이너는 2012년, 쏠리드의 본사가 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국내 첫 플래그십스토어이자 복합문화공간인 ‘맨메이드’를 오픈했다. 2층은 카페와 전시 공간, 3층과 4층은 ‘쏠리드옴므’, 5층은 ‘우영미’ 브랜드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매장보다 고객 편의 및 전시 공간이 더 우선 배치된 점이 특징이다.     

그는 맨메이드에 대해 ‘우리 가족들의 공동작품’이라고 했다. 가족이란 과천에서 ‘마이알레’라는 온실카페를 운영하는 조경 디자이너인 언니와 동생, 두 딸들과 작고한 우장희씨 등을 말한다. 부군은 외과 전문의로서 패션과 전혀 무관한 직종에 있다. 

큰딸(정유경)은 영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세인트 마틴)을 나와 최근까지 우영미와 ‘쏠리드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었다. 둘째딸(정유진)은 프랑스 파리에서 고교를 나와 스코틀랜드에서 대학(세인트 앤드류스)을 졸업하고 쏠리드에서 MD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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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팔레드 도쿄에서 가진‘우영미’ 2020 F/W 통합쇼.>

“글로벌 브랜드로 반석을 확실히 다지는 것이 당면 과제이자 목표”

우영미는 2월 중순 프리미에르 비종 전시회 참석차 프랑스 출장을 가면 파리오뜨쿠튀르프레타포르테연합회(Federation de la Haute Couture et de la Mode, 이하 연합회)의 파스칼 모랑 회장을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디디에 그랑박에 이어 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프랑스 패션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명이다. 

우영미 디자이너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2011년 연합회 소속의 파리의상조합(La Chambre Syndicale de la M ode Masculine) 정회원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인정받고 있어서 파리와 런던 등 세계 패션계의 비중 있는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교유를 이어오고 있다.        

또 매년 ‘가장 영향력 있는 글로벌 패션인물 500’을 선정해 발표하는 BOF(B usiness of Fashion)의 리스트에 2014년 국내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이후 3년 연속 선정될 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2018년에는 서울 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되어 DDP에서 2019 S/S시즌 개막쇼를 펼치기도 했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져온 우리나라의 유일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우영미. 그는 이제 어떤 목표를 갖고 있을까. 

“독립 브랜드를 운영한 지 벌써 32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정말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왔다. 국내외 기자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가 ‘우영미’밖에 없다는 얘기를 할 때 몹시 씁쓸하고 슬프다. 덩어리로서 무리지어 활동할 때 힘이 생기는 법일 텐데…. 하지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국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부분에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뿌듯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글로벌 브랜드’로서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브랜드가 글로벌 브랜드로 반석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현재 나의 당면과제이자 목표다.”

1~2년 전쯤 우영미 디자이너가 영국패션협회에서 하고 있는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이와 관련해 필자와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얼마 전엔 그가 ‘우영미 재단’을 구상하고 있다는 일부 보도도 있었다.  

그는 언젠가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지난 1월, ‘우영미’ 여성복 라인을 처음 선보였으니 이 브랜드가 자리 잡는 데에 그의 관심과 열정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우영미 디자이너가 이루어 놓은 것은 우리 패션계의 커다란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우영미 디자이너의 도전정신을 응원한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현대미술을 아는 만큼 패션 트렌드가 보인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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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울티모’ 디자이너 김동순

 

<월간멋> 기자 시절, 패션디자이너가 유명 화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의 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화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미술관장을 지내던 권옥연 화백(1923~2011), 디자이너는 미술대학 출신의 ‘울티모’ 김동순 실장이었다. 

김동순 실장과 강남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했는데, 검은색 지프 레니게이드를 운전하고 왔다. 시골길을 다녀오기엔 안성맞춤이었지만 패션디자이너가 자가용으로 지프를 직접 운전하는 경우를 처음 봐서 그때의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고가는 길이 제법 멀기도 했고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라 길을 잘못 들기도 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는 운전도 말투도 매우 씩씩했다. 단발머리에, 귀걸이나 목걸이 등의 치장을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1983년, 38세에 서울 압구정동에서 ‘울티모’로 데뷔한 김동순 디자이너는 동년배에 비해 출발이 10년쯤 늦다. 이화여대 조소과를 졸업하던 해(69년)에 동아방송 PD였던 송관률씨와 결혼한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75년에 남편이 이른바 ‘동아사태(동아일보사가 정부의 탄압을 버티지 못하고 부당함에 맞서던 기자들을 대규모로 해고한 사건)’로 강제 해직을 당하자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어느 날 남편의 선배 PD가 “패션디자인을 배우면 큰 패션회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봐주겠다”면서 국제복장학원을 소개해준 것이다. 속성반을 권유받았지만 ‘이왕 공부할거면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에 어린 두 자녀를 친정에 맡기고 1년 과정 정규반에 입학해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중 명동에서 우연히 권옥연 화백을 만났다. 권 화백은 김동순의 이화여대 재학 당시 회화과 교수였고, 스승과 제자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권 화백은 김동순에게 “패션디자인 공부? 잘 선택했다. 내 아내도 패션디자인을 하지 않느냐. 열심히 공부해라. 미적 감각도 뛰어나니 반드시 성공할 거다”라면서 격려해주었다. 권 화백의 부인은 극단 자유의 대표이자 무대의상 디자이너였던 이병복씨(1927~2017)다.

“어느 날 학원에 갔더니 분위기가 부산했다. 동료들이 ‘중앙디자인콘테스트’를 앞두고 준비하느라 난리였다. 나는 그때 코트를 만들고 있던 터라 그 옷을 완성해 출품했는데 입상했다. 콘테스트 사회를 보던 아나운서가 내 옷이 마음에 든다면서 자기에게 팔 수 없겠느냐고 물었는데, 판매용으로 만든 것도 아니어서 그냥 선물로 주었다.”  

&lt;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왼쪽)와 김동순 디자이너가 그린 해당 의상 일러스트(오른쪽).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 패션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가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우아하고 강렬한 컬렉션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gt;

<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왼쪽)와 김동순 디자이너가 그린 해당 의상 일러스트(오른쪽).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 패션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가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우아하고 강렬한 컬렉션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옷을 받은 아나운서는 김동순을 명동의 어느 매장에 추천해 줬고 면접을 보게 됐다. 일주일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낮 12시까지는 매장에서 판매도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아직 대여섯 살밖에 안된 아이가 둘인 ‘엄마’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는데, 다른 곳들도 조건은 비슷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한 대학 동기가 같은 대학 불문과 출신 친구인 M의 회사에 가보라고 권했다. M의 남편은 성도물산 최형로 사장이었다. 미국에 OEM으로 수출하던 성도물산이 내수시장 개척을 위해 새로운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최 사장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김동순이 입고 있던 면 티셔츠와 개더스커트를 보고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원단을 사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자, 최사장은 “우리가 그런 옷을 만들려고 한다”면서 옆 건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OEM 수출을 하던 곳이라) 엄청난 기계와 원단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고, 최 사장은 김동순에게 “여기에 있는 원단들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렇게 김동순은 1978년, 성도물산의 브랜드 ‘톰보이’ 디자이너로 패션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성도물산이 야심차게 개발한 ‘톰보이’는 브랜드 이름부터 색달랐고, 당시 여자 기성복은 상하의 한 벌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던 때여서 단품 위주의 ‘톰보이’는 출범과 동시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정장의 개념에서 벗어나 니트나 면, 코듀로이 소재 재킷, 데님, 티셔츠 등 지금은 패션의 기본이 되어버린 코디네이션 개념을 ‘톰보이’가 도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캐주얼 브랜드’가 등장하게 된 때, 김동순은 그 중심에 있던 ‘톰보이’ 디자인의 주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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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

남편의 강제 해직, 패션디자이너로 새 삶 시작

“78년 7월 ‘톰보이’ 오픈을 앞두고 면접을 봤는데, 언제부터 출근하겠냐고 해서 8월 1일부터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최 사장이 출근하기 전이지만 디스플레이용으로 옷 몇 점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일주일동안 여러 스타일을 만들어 매장에 전시했다.” 

그런데 그 ‘디스플레이용 옷’들의 인기가 폭발해 오픈 당일 매출 목표를 6배 정도 초과 달성했다. 출근하기 전부터 이른바 ‘대박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이어 ‘리니아(Line이라는 뜻)’라는 브랜드도 론칭했는데, 벨로아 소재를 주로 사용한 ‘리니아’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대박을 친 알짜 브랜드였다.

‘톰보이’에서 성과를 높이자 81년 교복자율화 바람을 타고 월급의 몇 배를 더 주겠다면서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어느 대기업은 기존 급여의 10배 이상을 주겠다, 토요일 오후 2시간만 근무해도 된다는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친구 남편의 회사에 다니면서 돈 때문에 이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나중에 대학에서 강사라도 하고픈 마음에 모교 대학원 복식디자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부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추가학점을 요구받고 특정 교수 과목의 점수까지 박하게 나오면서 대학원을 그만 뒀다. 대학원을 포기했더니 회사도 다닐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히니, ‘리니아’를 운영해보라며 스튜디오 차리는 비용까지 지원해줘서 1~2년 정도 운영하다가 1983년에 독립, 압구정동에 ‘울티모’를 열었다.  

‘울티모(Ultimo)’는 ‘가장 최근(the latest)’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남성명사다. 처음엔 남성복 브랜드로 시작했다가 6개월쯤 뒤부터 여성복으로 전환했는데, 같은 뜻의 여성명사인 ‘울티마(Ultima)’보다 어감이 더 마음에 들어서 그냥 쓰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 부군 송관률씨는 패션기업 경영인으로 탈바꿈해 아내가 한평생 디자인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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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를 알려면 현대미술 이해는 필수”

‘톰보이’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동안 김동순은 일종의 보너스 형식으로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출국 자체가 무척 까다롭던 시절이었기에 당시의 경험은 디자이너로서 안목을 넓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88년 여행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는 날개를 단 듯 했다. 인도만 10번 이상 다녀왔고, 네팔도 자주 가서 거의 가이드 수준일 정도. 스리랑카와 터키, 동유럽의 조지아나 우크라이나 등 일반인들이 자주 가지 않는 곳들도 일찍부터 많이 다녔다. 1989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관했다. 

김동순 선생은 “패션 디자이너에게 미술, 특히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강조한다. 90년대 초반 건국대와 이화여대에서 겸임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가장 강조했던 점도 “현대미술을 모르면 트렌드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크리스토 자바체프다운’ 또는 ‘안젤름 키퍼적인’이라고 할 때, 크리스토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독일 국회의사당 전체를 천으로 감싸고 파리의 명물 퐁 네프 다리도 천으로 감싼 미술가이고 안젤름 키퍼는 화가이자 조각가라는 특징은 물론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나 색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1년 1월, 김동순 디자이너는 당시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올해의 디자이너상’ 90년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신우, 진태옥, 앙드레김, 설윤형 등 이전에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받은 상을 데뷔한 지 7년 만에 받은 것이다. 그가 데뷔 10년도 안되어 정상급 디자이너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게 된다.  

첫째는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 입상한 이후 77년부터 매년 패션쇼에 참가하고, 이후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SFAA) 초창기 멤버로 최초의 서울컬렉션에 참가하는 등 신작 발표 무대를 끊임없이 가졌다는 것이다. 1990년에는 오사카컬렉션, 93년엔 도쿄컬렉션 등 일본 무대에서도 ‘디자이너 김동순’을 알렸다.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패션 선진국들은 매년 일정하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컬렉션 제도가 일찍부터 정착돼 있었다. 컬렉션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신작’을 발표하는 디자이너가 극히 드물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는 77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작을 발표해왔다. 

&lt;2006년 1월 24일 중국 광서TV가 설날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던‘울티모’컬렉션 패션쇼(오른쪽). 해당 시즌 컬렉션은 국내에서도 대 히트를 쳤다. photo 울티모 제공​&gt;

<2006년 1월 24일 중국 광서TV가 설날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던‘울티모’컬렉션 패션쇼(오른쪽). 해당 시즌 컬렉션은 국내에서도 대 히트를 쳤다. photo 울티모 제공​>

인체를 입체적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전공(조소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통미와 현대미술적 감각의 조화는 ‘김동순 디자인’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해마다 새롭게 해석하여 새 작품을 내놓는다. 

프랑스의 패션평론가 지아니 사메는 컬렉션 출품작을 평가할 때 “신인 디자이너들은 무엇이 새로운지를 중점적으로 보고, 기성 디자이너들은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본다”고 했는데, 김동순은 매 시즌 ‘이번엔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호기심을 갖게 만든 디자이너였다. 그의 80년대 90년대 의상들조차 최근의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각적으로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둘째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출발을 맞춤의상(양장점)이 아니라 기성복(톰보이)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크게 인정받아본 경험을 한 것은 김동순 디자이너 연배에서는 유일한 케이스였다.

특정 고객의 비위를 맞춰본 적이 없는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상대방이 동료나 선후배이건, 기자이건, 정부나 지자체 담당자이건 자신의 소신을 가감 없이 밝힌다. 상도의에 벗어나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또한 김동순 디자이너의 특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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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협찬>

김동순 디자이너는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서울 도곡동 울티모 본사 5층의 작업실은 원단 샘플, 세계 각국의 기념물들에 더해 각종 자료와 책들이 사방의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의 책 사랑은, 아버지 직장(대한중석) 때문에 강원도 영월에서 살던 10대 소녀 시절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서울 갔다 오면서 사다준 금박으로 장식된 책, <렌의 애가>(모윤숙)를 지금도 갖고 있을 정도. 나이 70이 되었을 때 가장 받고 싶은 선물로 ‘세계문학전집’을 원해서 1백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에, 사상전집 1백 권까지 2백 권을 선물 받았을 정도다. 

책 사랑 못지않게 눈에 띄는 취미는 스크랩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번 보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스크랩해둔다. 역사 관련 기록들이 많고, 인상적인 사진들(조각, 건축, 자연 등)도 스크랩해둔 게 많다. 보고 싶은 책들 관련 스크랩은 따로 두고 있는데, 여백마다 그 책에 대한 생각들이 손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다채로운 내용의 스크랩북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는 나에게 “미국 연방대법원청사에 공자 입상이 세워져 있는 걸 아느냐?”고 묻는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연방대법원 동편 입구에 모세 좌상을 중심으로 모세 왼쪽에 솔론 입상, 오른쪽에 공자 입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개신교가 중시하는 예수를 빼고 이 3인조 석상을 세운 이유에 대해 중앙일보가 2020년 1월8일자로 보도한 내용을 스크랩한 것이다.   

그가 “놀랍지 않느냐?”고 묻는다. 놀랍다. 그런 사실 자체도 놀랍고, 그런 사실에 관심을 갖고 놀라워하는 김동순 디자이너의 끝없는 관심사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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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길이 최적의 길이었다

김동순은 국제복장학원도,‘톰보이’라는 브랜드도, 중앙디자인콘테스트라는 행사도 알지 못했다. 지인에 의해 혹은 우연히 알게 되어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취직하고, 콘테스트에 입상했다. 

그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인데, 평생의 업으로 삼아 37년째 그 길을 가고 있다. 거짓 꾸밈을 싫어하고, 고정된 것보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패션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도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접촉하고 수용해온 삶. 쿠바 여행을 갔다가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읽고, ‘자신의 이상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다는 김동순. 그의 작업실 한쪽 벽엔 체 게바라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다. 

책과 미술, 여행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여전히 왕성하다는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패션디자이너는 ‘입어서 편하고, 입는 사람이 좋아하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차츰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한때 40개까지 매장을 운영했지만 IMF 이후 줄여나가 지금은 전국 백화점에 17개 매장을 내고 있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정리하면서 여행 다니고, 책 실컷 보는 것은 늘리는 삶, 그것이 김동순 선생이 지금 꿈꾸고 있는 삶이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지속가능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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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인드풀컴퍼니 서영지 대표, 오버랩 박정실 실장 

 

패션에서 지속가능은 이제 화두를 넘어 일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 누가 담당해야하는지, 수익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하는지 잘 아는 기업이 있을까?

현재 국내 패션 기업의 지속가능 실현 방법이라면 누가 만든지 조차 모를 친환경 소재를 사용해 예쁘지도 않은 제품을 만든다. 마케팅 수단이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일회성이다. 문제다. 

지속가능의 중심에 있는 패션 업계는 수년째 지속가능성 실현을 외치고 있다. 중요함은 알지만 소비자가 선택할만한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서 지속가능을 실현하기 위해 기획 단계부터 재고 원단을 쓰고, 다시 만들어 활용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국내 패션 업계를 향해 지속가능을 외치고 나선 두 사람이 있다.

마인드풀컴퍼니 서영지 대표와 오버랩 박정실 실장이다. 두 사람은 모두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출신이다. 서 대표는 남성복 시리즈 상품기획 팀장, 박 실장은 업사이클 브랜드 래코드 디자이너였다. 

근무 시점이 달라 서로 알지 못했지만 지속가능에 대한 관심이 같아, 서 대표가 사업 방향을 구상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다. 이들이 최근 지속가능이라는 하나의 ‘아젠다’를 가지고, 이를 실현해 보겠다며 의기투합했다.

 

팔릴 만한 제품이어야 한다

둘의 만남은 일종의 협업이다.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만나 패션 기업들이 실현하기 어려운 지속가능 패션을 대행해 주겠다는 기획안을 들고 나섰다.

서영지 대표는 “여러 패션 기업에서의 (실무)경험으로 상품기획 프로세스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현업에 있는 MD나 디자이너들이 지속가능 제품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죠. 그들이 직접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팔다 남은 재고를 활용해 다시 팔릴 만한 제품을 만드는 업사이클링을 제안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제안하는 업사이클링이란, 디자인이 가미되고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지속가능 제품은, 비싼 가격과 볼품없는 디자인, 업사이클 제품인 것처럼 티가 난다.

“재고 원단을 사용해 다시 제품을 만들 경우 2차 재고를 양산하는 방식으로 되어서는 안되요. 다시 만들더라도 상품성이 있고, 기업 입장에서도 수익적으로나 마케팅으로나 활용도가 있는 제품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패션 브랜드라면 누구나 재고가 있다. 3년 이상 넘는 악성 재고는 90% 할인을 해도 팔리지 않고 결국 소각되거나, 땡처리 둘 중 하나다.

버려지는 재고를 다시 신상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지속가능의 시작이 된다. 한 단계 나아가서는 판매로 이어지고, 다시 활용되는 자원의 순환이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원형의 순환구조다. 서영지 대표는 사업을 구상하던 중 지속가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초반에는 무작정 상품 기획 아웃소싱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국내 패션 업계는 아직 디자이너의 역할이 필요한 사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지속가능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면,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해야하는 데 외주 업체로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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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랩 박정실 실장(좌), 마인드풀컴퍼니 서영지 대표(우)>

박정실 실장은 지난 해 초 코오롱을 나와 자신의 브랜드 ‘오버랩’을 시작했다. 물론 지속가능 브랜드이다. 박 실장은 서영지 대표를 만나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두 사람은 지난 해 7월 지속가능 제품을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박정실 실장은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갔다가 수명이 다한 원단은 어떻게 처리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버린다고 하더라구요. 너무 좋은 원단인데 다시 쓰면 좋을 것 같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주시더라구요(웃음). 별도의 마케팅을 하지 않아 그리 반응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시도들이 계속 이뤄져야한다고 봐요.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지속가능이 더욱 구체화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속가능 실현 도와드립니다

서영지 대표는 “지속가능 상품기획 비즈니스를 제안하는 것이 조금 이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죠. 아직 지속가능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비용의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죠. 지속가능에 대한 시도가 실제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지 걱정하는 것에서 부터 가로막히기도 해요. 실무자들과 몇 번 상담을 진행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서영지 대표는 박정실 실장과 같은 실력 있는 지속가능 디자이너를 물색 중이다. 다양한 아이템의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시너지를 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함이다. 

“패션 기업들의 지속가능 실현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들의 남은 재고와 우리의 경험, 디자인력이 만나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박정실 실장은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다. 브랜드 디자이너와는 작업 방식도 다르고, 디자인적 사고의 시작부터 조금은 차이가 있다.

디자이너들은 머릿속에서 먼저 디자인을 구상하고 밑그림을 그리지만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들은 그럴 수 없다. 어떤 소재로, 활용해야할지 제품을 보고 판단해야하기 때문이다. 업사이클링 작업은 꽤 많은 공정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국내서 이를 소화해낼 수 있는 공장도 제한적인 상황이다.

 

양산도 가능하다

서영지 대표는 사업을 준비하면서 설문 조사도 진행했다. 업계 관계자와 지인들은 대상으로 지속가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지속가능 제품은 대부분 디자인 수준이 떨어지고, 비싸다는 의견이 많았다.

“프라이탁 등 지속가능 브랜드가 널리 알려지면서 20~30대 소비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더라구요. 아이를 키우는 밀레니얼 세대들은 이왕이면 의식 있는 소비를 추구하고, 가치소비 의지를 보였고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죠” 

대부분 지속가능 제품이라고 하면 맛배기, 보여주기식, 지나가는 마케팅 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량도 많이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의 실력은 조금 다르다.

어느 정도 양산이 용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적게는 100개 부터 많게는 500개 까지도 가능하다. 물론 지금은 가방과 같은 잡화 아이템에 한해서지만 규모가 커진다면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다품종 소량 시대인 만큼 백화점 브랜드들도 한 아이템을 500장 이상 만들지는 않는 상황에서 업사이클링 아이템을 500장 이상 만든다면 수익적으로도 괜찮은 수준이다.

우선은 재고를 활용한 잡화부터 시작해 의류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캐주얼이 약한 남성복 브랜드들이나 여성복 브랜드들도 좋은 원단으로 만든 제품이 시즌이 지났다고, 사이즈가 잘못됐다고 기획이 잘못된 제품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서영지 대표는 “정말 평소에 입을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 포인트에요. 파타고니아는 오히려 자신들의 브랜드 철학을 담아 더 비싸게 팔기도 하지만 우리는 적정 가격에, 디자인을 충분히 고려한 제품을 만들어 드릴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는 것을 티가 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조금 의아했지만 마케팅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기획단계 부터 재고 상품이나 소재를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이를 파는 행위만으로도 지속가능이 이뤄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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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서영지 대표와 박정실 실장이 버려진 천막소재를 활용한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gt;

<서영지 대표와 박정실 실장이 버려진 천막소재를 활용한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업사이클링 제품 제안 받아 보기

업체 입장에서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들기란 의외로 쉽다. 미팅을 통해 브랜드 콘셉트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마케팅으로 활용할 것인지, 스팟 아이템으로 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한다. 아이템에 대한 밸런스를 조정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의견을 나눈다. 어떤 재고를 어떤 아이템으로 만들어낼지에 대한 것이다. 다음은 브랜드가 가진 재고를 공개한다. 기획자가 물류 창고를 찾아 필요한 제품을 선정하고 다시 디자인해 새 제품을 만들어 낸다. 끝.

제품을 만들지 않고 남은 재고 소재를 제공한다면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도 있다. 재고 원단이 없는 브랜드는 없기 때문이다. 남은 재고 원단으로는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 맨투맨, 티셔츠, 가방 등 캐주얼은 물론 창고 구석에 있다가 버려질 원단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업사이클링 제품을 의류나 가방 등 품목으로 제한하지 않고 소비자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고 갖고 싶은 라이프스타일 굿즈로도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박정실 실장은 “가장 속상한 것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이 단순히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어 버리는거에요. 내가 만든 제품이 잘 사용되어야하는데, 그런 목적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업체들에게 수익이 되고, 재고를 다시 사용되는 모델을 만들고자 한거에요. 브랜드는 소재를 갖고 있고, 우리는 기획력과 디자인력을 갖고 있으니 뜻만 맞으면 실현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죠”라고 했다.

지속가능 대행업체가 아직 국내에는 없다. 해외에서는 리폼 대행업체나 기업과 연계한 비즈니스 모델이 많지만 국내에는 아직 없다. 없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안 하기엔 실력이 아깝다. 

서영지 대표는 “최근 몇 군데 브랜드와 협의를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고 있어요. 한 소규모 브랜드는 여력이 안 되고, 한 브랜드는 이를 담당해야할 디렉터가 고민 중 인가봐요.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죠. 디자이너들이 지속가능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하죠. 지속가능을 설득해야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가장 답답한 부분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패션 기업들은 단순히 제품을 잘 만들고 잘 파는데 만 생각이 미치고 있다. 환경 생각은 뒷전이다. 어떤 기획자들은 업사이클링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업사이클링 공정은 단계가 두 배로 많다. 해체부터 세탁, 다시 건조해서, 디자인하고 원단을 재단해, 생산 공장에 보내 꿰맨다. 말처럼 단순하면 좋으련만 다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음이 확실하다. 서 대표와 박 실장은 브랜드의 니즈를 파악하는 상담부터 시작해 직접 샘플을 만들고 디자인해 제안한다. 일반 브랜드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

“아마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못하는 업체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좋은 소재로 만든 재고들이 창고에서 자고 있다면 깨워주고 싶네요.”

무조건적인 업사이클링은 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재고로 다시 제품을 만들어봐야 또 재고를 양산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것은 안 팔렸을 때 얘기고 팔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디자인도 좋고 심지어 제품이나 소재를 재활용했다면, 또 팔렸다면, 재고는 수익이 되고, 지속가능은 이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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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다 된 패러글라이딩 원단으로 만든 가방 >

재고로 재고를 만들지 않는다

소비자에게 매력있는 제품이어야 업사이클링도 의미가 있다.

박정실 실장은 “어차피 버릴 원단이면 다시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닌가요? 하하”

“계절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시즌 개념이 재고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죠. 사람들은 트렌드를 쫓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임에도 촌스러워 졌다며 치워버리고 새 제품을 사니까요. 좋은 가방을 계속 들 수 없도록 새 것을 매번 만들어내는 행위도 문제라고 봅니다.”

패션에 대한 딜레마는 해결책이 없다. 새제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패션 산업을 위축될 것이고 계속 만들어내자니 지구가 울고, 지속가능을 실현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뤄져갈지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과 노력이 패션 업계가 지속가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다면 절반 이상의 성공일 것이다. 

서영지 대표는 “패션 상품이 만들어지기 까지 많은 과정이 있지만 디자이너만 노력해서는 안 되죠. MD도 최대한 재고를 줄일 수 있도록 적절히 발주해야하고, 소재를 만드는 공장도 환경을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만들었어도 어쩔 수 없이 재고가 남겠지만 모두 맡은 분야에서 지속가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업계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더 좋고 예쁜 소재 개발해 국내 사업 키울 것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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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엘이이’로 돌아온 이지연 디자이너  

디자이너 컬렉션 ‘자렛’은 2009년 론칭 이후 곧바로 신생 브랜드답지 않은 시장성과 완성도로 호평을 얻었다. 젠더 경계를 허물고 남성복과 여성복의 매력을 모두 가진,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을 딱 적당하게 소화한 컬렉션은 글로벌 트렌드와도 잘 맞았다. 

이지연은 브랜드 론칭 2년 만에 정부, 지자체가 지원하는 신인 패션 디자이너 지원 사업의 대상자로 자주 이름을 올리는 디자이너가 됐다. 난생 처음 참가한 해외 트레이드 쇼에서 현장 수주를 받았고 홍콩, 파리, 뉴욕 등 참가하는 트레이드 쇼마다 꼬박꼬박 오더를 따내고 고정 거래선을 늘렸다.   

2015년 3월 열렸던 ‘서울패션위크 201 5 F/W’ 서울컬렉션 참가를 기점으로 그는 ‘성장가능성이 높은 신인’에서 ‘시장을 읽는 눈이 탁월한 실력파’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시가 패션쇼를 지원하는 제너레이션넥스트에 연속 3회 선정되고 난 후였다. 

그해 가을, 그리고 2016년 봄까지 이어 컨셉코리아(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디자이너 글로벌 마케팅 지원 프로그램)의 12, 13번째 시즌 주역이 됐다. 뉴욕패션위크 여성복 컬렉션 기간 데뷔 패션쇼도 가졌다. 국내 영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입소문이 크게 나서 유명 걸 그룹의 무대 의상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자렛’은 2017년 일정 규모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나서는 기업쇼로 서울컬렉션을 치렀다. 꽤 열성적인 투자사가 지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그 후 한동안 서울패션위크 공식 일정에 ‘자렛’이 올라오지 않았고, 연락도 닫질 않았다.  

2년의 공백, 그리고 새 브랜드 ‘엘엘이이’

이지연 디자이너는 작년 10월, 2년의 공백을 깨고 ‘엘엘이이(llee)’로 돌아왔다. 

‘서울패션위크 2020 S/S’을 통해 선보인 ‘엘엘이이’의 첫 시즌 컬렉션은 여성복을 메인으로  남성 컬렉션까지 선보였다. 사실 패션쇼를 보기 이전에는 왜 새로운 브랜드를 들고 나왔나, 똑 떨어지는 실루엣이 예뻤던 ‘자렛’의 연장선이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쇼피스 비중이 높은 컬렉션에 적잖이 놀랐다. 

이태원 주택가 골목에 낸 아담한 작업실 겸 사무실에서 만난 이지연 디자이너는 “사실 조금 더 준비해서 발표하고 싶었다”고 했다. 

“S/S 시즌에는 애슬레저 트렌드를 ‘엘엘이이’만의 감성으로 풀었다. 지금의 애슬레저 룩은 운동할 때만 입는 것이 아니니까 패션성이 있는, 제대로 된 애슬레져 룩을 제안하고 싶었다. 

‘엘엘이이’ 쇼에서는 더 완성도를 높인, 예술적 컬렉션을 보여주고 싶다. 무엇보다 원단을 개발하고 싶었는데, 다음 시즌부터는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좋은 캐시미어, 울 공급처도 확보했고 설치 미술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의 폭을 넓히면서 다양성을 가져가는 컬렉션으로 만들겠다. 커머셜한 스타일은 세컨 브랜드로 전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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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에게 많이 묻고, 배우는 시간 가질 생각이에요"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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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휴학생 신분의 작은 체구, 귀여운 외모의 앳된 모습은 여전했다.

윤자영 스타일쉐어 대표를 지난 2015년 당시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은 시간이 꽤 지나서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열정적인 표정과 눈빛, 힘이 실린 목소리도 여전하다.

대신 처음 봤던 열정 넘치고 특유의 밝은 모습의 새내기 창업가 모습은 지워졌다. 예비 유니콘 기업 타이틀을 확보한 주목받는 기업인으로 성장한 그녀는 5년이 지난 지금이 업무 강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한다. 시간에 쫓기듯 쌓였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 했다.

현재 스타일쉐어 직원 수는 120여 명. 지난해 기준 거래액 규모는 약 1천억 원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스타일쉐어를 예비 유니콘기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윤자영 대표가 11년 이라는 시간 동안 만들어낸 성적표다.

새해는 더욱 특별하다고 말한다. 지난 2018년 인수했던 온라인 미디어 커머스 플랫폼 29CM(법인명 에이플러스비)의 운영까지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다. 에이플러스비 창업자인 이창우 대표가 퇴사하면서 윤 대표가 책임지게 됐다.

중압감도 크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새로움을 표방하며 주목도가 높았던 곳인데다 창업자 이창우 대표가 끌고 온 29CM의 첫 대표이사 교체라는데 있다.

- 심정이 어떠한가.

“사실 이창우 대표 사임 결정 이후 고민이 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웃음) 최근까지도 그랬다. 29CM은 다른 커머스 플랫폼과 달리 특별함이 가득한 곳이다.

이창우 대표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던 만큼 공백에 대한 부담감이라고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문득 29CM 사무실을 둘러보다 이창우 대표가 빠진 공간에 생각보다 수많은 구성원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들의 능력치와 29CM은 그대로 있었다. 내가 딱히 해야 할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찰라 부담감과 걱정은 줄었다.”

- 단독 대표직이 갖는 의미는.

“29CM을 이루는 직원들의 수만 100명이 넘는다.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이들과 계속해서 함께 한다. 사업의 방향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이 소요되는데 있어 중요한 의사결정을 책임지고 판단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29CM을 만들어 온 구성원들에게 많이 묻고,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유지하는 것 역시 가장 중요한 경영자의 덕목이다. 업무 환경이나 프로세스는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빠르게 파악해 개선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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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곳(29CM, 스타일쉐어)이 함께 한지 2년이다. 그 동안 달라진 점은.

“서비스 슬로건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한 가이드(Guide to better choice)’에 집중했다. 29CM이 잘 하고 잘 되는 분야와 잠재적 성장 영역으로 평가된 곳의 개발을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지난 2년간 새롭게 만들어진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오프라인 공간 29CM 스토어를 활용한 ‘브랜드 소셜 클럽’이 그 중 하나다.

입점사 중 참여를 원하는 브랜드의 지원을 받아 강남역에 위치한 오프라인 공간 ‘29CM 스토어’에서 진행하며 소비자가 직접 보고, 만져보며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상품을 온라인 공간에서 소개하는데 한계가 있는 브랜드에게 외연(外延) 확장 기회를 제공하고 소비자는 보다 정확한 브랜드 스토리와 나은 쇼핑 경험을 갖게 되는 구조다. 29CM의 강점인 문화 행사 카테고리도 강화됐다.

매월 진행되는 시중 문화 행사를 모아 구독 형태로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컬쳐 캘린더’ 서비스를 전개 중이다. 바쁜 일상 속 전시, 공연, 그리고 각종 이벤트 정보를 취득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구독을 통해 원하는 행사에 대한 알림기능과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다.

29CM은 커머스 회사이지만 미디어 콘텐츠를 발신하는 하나의 플랫폼이라는 측면에서의 접근이다. 단순히 상품을 파는 곳이 아닌 조금 더 나은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큐레이터 역할을 하는데 집중했다.

브랜드를 단순히 상품을 파는 매개가 아닌 스토리와 철학이 가득한 콘텐츠로 알리는 일이 더욱 고도화됐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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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CM 거래액 규모가 크게 성장했다.

“맞다. 2년 전보다 약 3~4배 정도 성장했다.(웃음) 지난해 거래액 규모는 900억 원이다. 그 전까지는 많이 낮은 상태다. 다만 29CM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 보다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9CM이 운영하는 자사 미디어 채널인 PT(온라인 프레젠테이션)등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인 PT 광고 콘텐츠 매출을 공개할 수 없지만 지난 2014년 처음 선보인 이후 지금까지 250개 기업과 브랜드가 참여했다. 주로 2030 밀레니얼 고객을 상대로 감성적인 브랜딩 캠페인을 펼치고 싶은 기업들이 선호한다.

패션·의류뿐만 아니라 세계적 전기차 기업 테슬라, 마이크로소프트, 넷플릭스 다이슨 등 글로벌 브랜드도 29CM의 고객사다. 커머스가 전부는 아니다.

거래액 규모로 나열하는 과거의 잣대로는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진정성 있는 콘텐츠로 브랜드를 소개하고 29CM 특유의 톤과 목소리로 제안하는 콘텐츠 개발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굳이 커머스 측면에서 성장 요인을 찾으라고 한다면 미디어 콘텐츠 발굴과 서비스에 집중했던 만큼의 커머스 영역의 투자다. 커머스 카테고리에서 사용자 편의성 개선, 29CM 내 판매되는 상품 가격과 시장의 할인된 가격의 간극을 메우는 것 등이 있을 것이다. 특별한 전략은 없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29CM 인수 직후 가장 우선순위는 소비자 경험(Customer Experience) 개편 업무였다.

이용자의 사용 편의를 넘어 최종 판매 가격이나 보상과 같은 구매 이후 고객 만족도 개선에 집중했다.

첫 번째는 MD부서의 운영 방식 수정이다. 온라인 특성상 손쉽게 채널별로 가격비교가 가능해 조금이라도 싸게 판매하는 것이 유리하다. 다른 커머스 플랫폼이 입점사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데 집중하며 판매 가격을 최저가로 맞춘다.

29CM의 경우 커머스보다 콘텐츠 미디어 기능의 강점이 높다보니 세일즈 포인트와 상거래 시장 대응이 미흡했다고 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입점 브랜드가 자발적으로 세일을 시작하면서 각종 커머스 플랫폼과 직영 쇼핑몰에서 인하된 가격으로 판매했지만 우리만 세일을 적용하지 못한 경우다. 그래서 입점사와 보다 긴밀하고 촘촘한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29CM 에센셜 상품이다. 단독 상품 라인으로 세일즈 데이터를 분석해 브랜드에게 제공하고 우리 채널에서 잘 팔릴만한 상품을 선별해 판매한다. 개성이 강한 서비스인 脫가격 정책의 특별 상품 판매 방식이다. 현재 성과가 두드러져 예상되는 기대치도 높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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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쉐어와 29CM의 협업 구조를 이루고 있나

“각 사의 장점이 명확하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경우가 많다. 스타일쉐어는 개발인력이 두텁다. 경험치도 높다. 29CM은 해당 영역에서 스타일쉐어보다 약하다. 29CM은 스타일쉐어가 보유하지 못한 콘텐츠 개발 영역이 뛰어나다. 공동 프로젝트 형태의 협업은 없지만 양 사의 노하우와 경험치를 경계 없이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너지를 낸다."

- 새해 목표와 계획이 무엇인가

“우리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집중하고자 한다.(웃음)”

"스타일쉐어와 29CM은 국내에 유일한 콘텐츠 중심의 커머스 플랫폼이다. 실제로 콘텐츠를 통해 발생되는 매출이 30%가 넘는다. 이것이 우리의 강점이고 우리만 할 수 있는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채널과 판매를 위한 채널이 구분되어 있었지만 최근에는 구분이 없어졌다. 인스타그램은 커머스 기능을 탑재하고, 오픈마켓은 콘텐츠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온라인 소비자 여정이 콘텐츠로 시작해서 커머스로 연결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본다.

29CM은 올해 개발팀을 구축해 백엔드 영역의 고도화를 추진할 예정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용자 요구에 대응하며 최대한 사용 편의를 높여나갈 생각이다.

이미 스타일쉐어의 최고 기술 책임자(CTO)가 29CM으로 자리를 옮겨 프로젝트에 착수한 상태다."

- 새로운 사업과 서비스가 궁금하다.

“29CM 미디어 2.0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29CM 서비스 최초 비디오 기능이 추가된 방식인데 이달 베타 버전을 오픈한다.

지금까지 29CM 에디터가 제작한 콘텐츠만 보여주는 방식에서 외부 크리에이터로 저작 권한을 확대했다.

29CC(Contents Crew)라는 콘텐츠 전문가 집단을 모집해 저작 권한을 부여하고, 내부 기준에 따라 검수 후 게시하게 된다. 29CM의 대표 콘텐츠 라인 PT서비스에서 진화된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까.(웃음) 이미지와 텍스트에서 영상이 추가된 형태가 될 것이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