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16구 센 강변에 있는 팔레 드 도쿄에서 우영미 디자이너(61, ㈜쏠리드 대표)의 2020 F/W 컬렉션이 열렸다.
팔레 드 도쿄는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작품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전시하는 곳으로 유명한 현대미술 전시관이다. 이번 우영미 컬렉션은 처음으로 ‘우영미’의 여성복 라인을 선보여 특히 눈길을 끌었다.
1월말 귀국해 2월 중순 세계 최대 원단 전시회인 프리미에르 비종(Premiere Vision Paris) 출장을 떠나기 전인 2월 6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본사 2층 접견실에서 우영미 디자이너를 만났다.
80년대 중반, 후배 기자가 신진 디자이너 한명을 소개해 주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잠재력도 무궁무진해 보이니까 유심히 지켜보라면서.
숏 커트 헤어스타일에 화장기도 거의 없어, 소년 같은 풋풋함마저 느껴지던 그 디자이너는 목소리가 조용조용하고 말수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패션을 화제로 얘기를 꺼내면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개 단답식으로 표현하지만, 그 안에 핵심이 다 들어 있었다.
대기업에서 나와 몇몇 회사의 디자이너를 거쳐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초입에 ‘쏠리드옴므’라는 독립 매장을 차릴 무렵 그를 ‘유망한 신진 디자이너’로 인터뷰해 <월간멋>에 소개했다. 30여년 만에 다시 인터뷰이로 만난 우영미는 이미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우뚝 선 존재가 되었다. 그의 재능을 떡잎부터 알아보고 소개해준 사람은, 나중에 방송인으로도 유명해진 유인경 기자였다.
세월이 많이 지나 그의 위상도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졌지만 숏 커트 헤어스타일의 수수한 모습, 말수가 적은 대신 핵심을 짚는 어투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신인 때 가졌던 패션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세계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점이 놀랍고 자랑스럽다.
<30주년 기념 패션쇼 백스테이지에서의 우영미 디자이너>
- 데뷔 32년 만에 여성복을 시도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옷에서 성(姓)을 구별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입는 옷도 그렇고, 내 딸들과 자매들은 일찍부터 ‘우영미’와 ‘쏠리드옴므’를 입었다. 거기에 ‘여성에 맞게’ 조금 변화를 준 것이 이번에 선보인 우영미 여성복 라인이다. 우영미 여성복은 기존 우영미의 또 다른 한 측면(another side)일 뿐이라면서 남녀가 서로 성을 바꿔서 ‘함께’ 입을 수도 있게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델들도 장발의 남성모델과 단발의 여성모델 등, 옷이나 모델의 모습만 보면 잘 구별이 가지 않도록 구성했다는 것이다. 첫 선을 보인 우영미 여성복에 대한 반응이 기대 이상인데, 이를 본 사람들은 그동안 ‘우영미’에 대한 해외에서의 존재감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고 했다. 우영미 여성복은 2020 F/W 시즌부터 서울과 파리의 플래그십스토어와 우영미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회사가 원하는 옷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옷 만들고 싶어서” 독립
1984년 어느 날, 필자는 보그지를 보다가 1983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 패션 어워드에서 한국 디자이너가 3등에 입상했다는 기사를 보게 됐다. 입상작은 한복을 모티브로 한 이브닝드레스였는데, 저고리 없이 치마만으로 이브닝드레스를 멋지게 연출한 옷이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프랑스의 티에리 뮈글러, 이탈리아의 미소니,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 등 쟁쟁한 패션 디자이너들이었다.
수상자는 우영미.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한 뒤 반도패션(LF의 전신)에서 일하고 있던 입사 2년차의 신입 디자이너였다. 한국에서는 이 사실이 보도되지 않았고, 입상자인 우영미도 당시에는 자신의 기사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훗날에 기사가 났던 보그지를 그에게 주었던 기억이 난다.
행사 직후 이세이 미야케는 통역사를 통해 “나는 우영미 씨를 1등으로 채점했는데 아쉽다”고 극찬하면서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 있으면 일본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은 우영미 디자이너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대기업을 나와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ODM회사 뻬르마와 레드옥스를 거쳐 1988년 자신의 브랜드인 ‘쏠리드옴므’로 독립한다.
뻬르마와 레드옥스가 모두 남성복 브랜드여서 우영미는 자연스럽게 남성복 디자이너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30여 년 만에 ‘돌고 돌아’ 다시 여성복을 하게 되었다며 웃는다.
비교적 안정적인 패션기업 디자이너의 길을 마다하고, 대학졸업 6년 만에 독립한 이유를 묻자 대답이 간단하다. “회사가 원하는 옷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옷을 만들고 싶어서”라고.
그가 대기업을 나와 잠깐 근무했던 뻬르마 회사에 들러 그가 디자인한 옷들을 본 적이 있다. 공군 항공 점퍼였는데, 소매선이 딱 한복의 풍성한 붕어배래였다. 서양인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했다. 한복을 특별히 공부한 적이 없다는데, 오사카 패션 어워드에서도 그랬듯이 우영미의 옷에서는 한국적 정서와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2018년 10월 DDP에서 열렸던 2019 S/S 서울패션위크‘솔리드옴므’오프닝쇼. 그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우영미는 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무모한 도전, 그러나 끝내 성공한 파리 진출
데뷔한지 14년쯤 지난 2002년, 우영미는 파리 진출을 시도한다. 1993년에 디자이너 이신우와 이영희 등이 파리컬렉션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남성복 디자이너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영미 본인 스스로도, 전례도 없었고 어떻게 진출해야 하는지, 심지어 패션쇼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파리로 떠났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초창기 한동안은 엄청난 자괴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런 ‘무모한 도전’을 왜 했을까?
“외국의 명품 브랜드는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고, 무한 매출경쟁으로 백화점으로부터는 갑질 당하기를 수백 번 겪다보니 그런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텃세 세기로 유명한 파리 패션계에서, 아무런 네트워크나 인프라가 없던 동양인 여성 우영미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우영미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때의 선택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자괴감에 시달리면서도 힘든 도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든든한 지원군으로 막내 동생 故 우장희의 역할을 꼽았다.
‘쏠리드옴므’ 초창기부터 언니의 사업을 도운 우장희는, 우영미와는 성격도 상반된다. 언니가 학창시절부터 모범생 스타일로, 매사 꼼꼼하게 확인하고 추진하는 신중한 성격인데 반해 동생은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앞만 보고 돌진하는 추진력과 실천력이 강한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쏠리드옴므’를 시작할 때부터 사업적인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특히 파리 진출에 있어서는 우장희의 추진력과 돌파력이 큰 힘이 되었다.
파리 진출 초기에, 언니가 힘들어하면 “그럼 이제 와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갈거야? 왔으니까 끝을 봐야지!”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이끌어주던 동생이 2015년 7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우영미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후반에 유명을 달리한 동생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도 우영미는 눈가가 촉촉해진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겪은 그때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는 우영미. 이후 매일 명상과 108배를 하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연초가 되면 4백배나 5백배도 하지만 평소엔 108배를 하고 출장 등으로 108배를 다 못하면 36배로 줄여서라도 하고, 명상은 매일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팔레드 도쿄에서 가진‘우영미’ 2020 F/W 통합쇼.>
“매출보다 브랜드 가치가 더 중요하다”
- 파리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2002년 처음 진출한 뒤 10년쯤 지나 봉마르쉐에 매장을 오픈했을 때, 이어서 쁘렝땅에도 오픈하면서 나도 그랬고, 파리지엔들도 ‘이 회사는 쇼만 하고 돌아가는 곳이 아니구나’ 하는 인식을 하게 된 것 같다.”
- 2019년에 베이징과 상하이에 단독 매장 낼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쏠리드옴므’는 2015 F/W 시즌부터 중국 프랜차이즈 파트너를 통해 10시즌 동안 중국내 영업을 해왔고 ‘우영미’는 2014년부터 홍보회사와 손잡고 홍보하고 있다. 중국내에 ‘우영미’의 단독매장은 없고 파리컬렉션 기간 중 바잉하는 형태로 판매하고 있다. 중국에 단독매장을 내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있다.”
- 일본과 미국, 캐나다는 일본의 온워드 카시야마가 판권을 갖고 있다고 알려졌다.
“초창기에 잠깐 일본지역에만 온워드 카시야마가 판권을 가진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온워드 카시야마도 우리 옷을 구매하는 곳 중의 하나다. 미국과 캐나다는 통상적인 바잉 시스템으로 판매하고 있다.”
‘쏠리드옴므’와 ‘우영미’ 브랜드의 가장 큰 주안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포지셔닝’이라고 한다.
‘우영미’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매 시즌 컬렉션을 소개하는 디자이너 라벨.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하이엔드 마켓, 럭셔리한 젊은 소비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쏠리드옴므’는 컨템포러리 남성복 시장의 영역에 속하는 브랜드로서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우영미’와 비교하자면 소비자층의 폭이 좀 더 넓다.
하지만 두 브랜드 모두 매출보다 브랜드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우영미 디자이너가 데뷔 초부터 갖고 있던 자부심과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동안 ‘동양 여자가 만드는 서양 남성복’으로 파리 패션계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은 우영미는 파리의 저널리스트들이나 디자이너들로부터 “우영미의 옷에는 유럽의 명품 브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양적 섬세함과 우아함이 들어 있다”는 평을 들어왔다. 우영미 브랜드와 해외 유명 남성복 브랜드의 가장 큰 차별점인 것이다.
<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팔레드 도쿄에서 가진‘우영미’ 2020 F/W 통합쇼.>
- 패션계에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는 SNS 마케팅 전략에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우영미’와 ‘쏠리드옴므’의 고객은 다 영맨이다. 내 옷의 소비자들은 백화점에서 구매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소통을 주로 휴대폰으로 하는 세대다. 파리에서 컬렉션을 하면, 내 옷에 대한 기사들이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그 정보를 SNS로 팔로워들에게 제공한다. SNS 정보제공은 마케팅팀에서 담당하고 있다.”
- 몇 년 전부터 뉴욕 패션위크에서 일부 디자이너들이 컬렉션 발표를 동시 중계하면서 판매하기도 한다. ‘컬렉션 발표 후 6개월 뒤 판매 한다’는 기존의 원칙이 깨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우영미 측의 대책은?
“홍보는 컬렉션 발표와 동시에 할 수 있지만, 옷 판매는 불가능하다. 원단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컬렉션 발표와 동시에 판매도 할 수 있을까? … 우리 시스템으로는 그렇게 못한다.”
쏠리드의 지난해 매출규모는 약 543억 원 정도. ‘우영미’보다는 ‘쏠리드옴므’의 매출비중이 높고, 해외보다는 국내의 매출규모가 더 큰 편이다. 최근 3년간 국내 매출이 60% 정도 성장해서 국내 매출규모의 비중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직원 수는 해외 직원을 포함해서 총 1백 여 명 정도 된다.
우영미 디자이너는 2012년, 쏠리드의 본사가 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국내 첫 플래그십스토어이자 복합문화공간인 ‘맨메이드’를 오픈했다. 2층은 카페와 전시 공간, 3층과 4층은 ‘쏠리드옴므’, 5층은 ‘우영미’ 브랜드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매장보다 고객 편의 및 전시 공간이 더 우선 배치된 점이 특징이다.
그는 맨메이드에 대해 ‘우리 가족들의 공동작품’이라고 했다. 가족이란 과천에서 ‘마이알레’라는 온실카페를 운영하는 조경 디자이너인 언니와 동생, 두 딸들과 작고한 우장희씨 등을 말한다. 부군은 외과 전문의로서 패션과 전혀 무관한 직종에 있다.
큰딸(정유경)은 영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세인트 마틴)을 나와 최근까지 우영미와 ‘쏠리드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었다. 둘째딸(정유진)은 프랑스 파리에서 고교를 나와 스코틀랜드에서 대학(세인트 앤드류스)을 졸업하고 쏠리드에서 MD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1월 18일 프랑스 파리 팔레드 도쿄에서 가진‘우영미’ 2020 F/W 통합쇼.>
“글로벌 브랜드로 반석을 확실히 다지는 것이 당면 과제이자 목표”
우영미는 2월 중순 프리미에르 비종 전시회 참석차 프랑스 출장을 가면 파리오뜨쿠튀르프레타포르테연합회(Federation de la Haute Couture et de la Mode, 이하 연합회)의 파스칼 모랑 회장을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디디에 그랑박에 이어 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프랑스 패션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명이다.
우영미 디자이너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2011년 연합회 소속의 파리의상조합(La Chambre Syndicale de la M ode Masculine) 정회원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인정받고 있어서 파리와 런던 등 세계 패션계의 비중 있는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교유를 이어오고 있다.
또 매년 ‘가장 영향력 있는 글로벌 패션인물 500’을 선정해 발표하는 BOF(B usiness of Fashion)의 리스트에 2014년 국내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이후 3년 연속 선정될 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2018년에는 서울 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되어 DDP에서 2019 S/S시즌 개막쇼를 펼치기도 했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져온 우리나라의 유일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우영미. 그는 이제 어떤 목표를 갖고 있을까.
“독립 브랜드를 운영한 지 벌써 32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정말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왔다. 국내외 기자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가 ‘우영미’밖에 없다는 얘기를 할 때 몹시 씁쓸하고 슬프다. 덩어리로서 무리지어 활동할 때 힘이 생기는 법일 텐데…. 하지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국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부분에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뿌듯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글로벌 브랜드’로서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브랜드가 글로벌 브랜드로 반석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현재 나의 당면과제이자 목표다.”
1~2년 전쯤 우영미 디자이너가 영국패션협회에서 하고 있는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이와 관련해 필자와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얼마 전엔 그가 ‘우영미 재단’을 구상하고 있다는 일부 보도도 있었다.
그는 언젠가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지난 1월, ‘우영미’ 여성복 라인을 처음 선보였으니 이 브랜드가 자리 잡는 데에 그의 관심과 열정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우영미 디자이너가 이루어 놓은 것은 우리 패션계의 커다란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우영미 디자이너의 도전정신을 응원한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