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패션광고의 전설 ‘지오다노’ 만든 시대의 카피라이터 ‘W camp’ 이지희 대표
신나는 사이키뮤직이 배경으로 깔린 클럽.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춤에 무아지경에 빠진다. 클로즈업되는 한 쌍의 커플. 고혹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유혹하는 여성, 상대 남성이 여성의 머리를 팔로 끌어당겨 감싸 안는다.
여기에 과감한 의상도 한몫 톡톡히 하는 파격적인 영상의 2004년도 ‘지오다노’ 광고. 전지현과 정우성이 주인공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파격적 연출의 이 CF 동영상은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처음부터 방송 불가를 예상했던 광고다. 당시엔 심의가 지나치게 엄격해서 ‘지오다노’의 새로운 콘셉트(기본 아이템으로 레이어드 착장해 섹시하고 스타일리시하게 입어라)를 전달하기 어려웠다."
"전지현이 컨셉을 이해하고 잘 표현해줘서 결과가 좋았다. 당시 젊은 친구들이 PC 바탕화면에 영상을 깔아놓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때부터 전지현은 최고의 광고모델이었고 현재도 그녀만한 모델은 찾을 수 없다. 프로정신이 완벽한, 최강의 셀럽이다.”
당시 ‘지오다노’ 광고를 기획, 제작했던 W camp 이지희 대표의 말이다.
이지희 대표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21년째 ‘지오다노’ 광고를 맡고 있다. 부침이 심한 패션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20년 이상 브랜드의 광고를 한 기획자가 맡고 있다는 점도 이례적이지만, 그동안 선보인 광고들이 시즌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것도 그렇다.
‘방송 불가’도 불사했을 만큼, 콘셉트 표현에 철저했던 이지희 대표는 2008년에는 9분 50초에 달하는 미니 드라마 형식의 광고도 제작했다. 전지현과 정우성 장동건의 삼각 러브 라인이 그려지는 내용이다.
TV CF용이 아니라 웹 사이트를 통해 지오다노 매장에서 선보였던, 애초부터 미디어 접근이 달랐던 광고로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신민아와 정우성 소지섭 광고(2013)>
- 한 브랜드의 광고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비결이 궁금하다.
“첫 광고가 1999년 1월이었다. 당시 각 브랜드 제품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어 이미지로 광고하기 좋은 시기였다. 광고 의뢰를 받고 나서 ‘지오다노만의 이미지 만들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한 끝에 영화 화법으로 풀자고 방향을 잡았다. 젊은 층이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를 모두 조사했고, 모델은 톱스타로 쓰기로 했다."
"첫 모델로 정우성을 선택한 것은 당시 영화 ‘비트’가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흰 셔츠를 입히고 비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장면을 쓰자’고 정한 뒤 신문의 양쪽 전면을 통으로 채워 어떠한 광고 문구 없이 ‘지오다노’만 넣었다. 당시 양 전면 광고는 자동차 광고 외에는 거의 없었고 패션 광고에서는 첫 시도였다.”
정우성은 ‘지오다노 광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정우성 뿐 아니라 고소영, 전지현, 장동건, 소지섭, 신민아, 김우빈 등 그동안 ‘지오다노’ 광고에 출연했던 모델은 모두 쟁쟁한 톱스타들이다.
<2004 방송불가 판정받은 지오다노 광고>
“모델은 당대의 톱 영화배우를 중심으로 캐스팅했지만 인기만 있다고 해서 캐스팅했던 건 아니다. 소위 직업의식이 뚜렷한 프로페셔널을 뽑았다. 배우로서 손색이 없고 실력을 갖춘 인물인지 검증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니다."
"가격에 비해 가성비가 좋은 ‘지오다노’와 어우러지기 위해 새로운 프리미엄을 표현해줄 수 있는 명품배우,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셀럽이 필요했다. 스타일이 살지 않아 메인 광고에 노출되지 않았지만 국민배우 최민식씨도 ‘지오다노’ 모델이었고, 드렁큰타이거도 소지섭도 함께 했다.”
지오다노 광고가 주목받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홍콩 브랜드인 ‘지오다노’가 소비자들에게 국내 토종 브랜드로 인식되도록 한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은 인식의 싸움이다. 국내 소비자에게 홍콩의 패션 브랜드가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요소는 아니다. ‘지오다노’가 만약 파리나 밀라노,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패션브랜드였다면 광고전략도 달라졌을 것이다."
"철저히 국내 소비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톱클래스의 영화배우로 모델을 정한 것도 이같은 핵심적인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홍콩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도록 한국 최고의 캐주얼로 인식되게 하고 싶었다.”
그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광고”여서 특별히 애착이 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오다노’ 광고는 ‘한준석 사장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파격적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두 수용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준석 사장은 톱스타와 당대 최고의 CF감독, A급 스타일리스트를 동원할 수 있도록 제작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광고 카피로 문제의 해답을 주다
지오다노 광고가 패션 광고의 전설이라면, 이지희 대표 역시 광고업계 특히 카피라이터 마켓에서는 신화적인 존재로 손꼽힌다.
그녀는 지난 1984년 오리콤에 입사해 광고 업계에 입문한 후 웰컴 부사장과 포스트비주얼 공동대표, 현재의 W camp 대표에 이르기까지 35년간 광고인의 길을 걸어왔다. 소비자들의 기억에 남는 새로운 시도로 국내외에서 굵직굵직한 광고상도 많이 받았다.
먼저 입사 6년차인 1989년, 쁘렝땅백화점의 지하철 광고로 생애 첫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을 수상한다. 이 광고는 지하철 S타입(칸의 중간쯤 위쪽에 있는 공간)에 ‘여러분은 지금 쁘렝땅백화점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계십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것으로, 당시 쁘렝땅백화점이 을지로3가에 숨어 있어 장소를 강조한 광고다. 신생 백화점의 가장 큰 고민을 광고문구로 해결해준 셈이다. 당시 장소를 강조하는 유형의 첫 케이스로 평가되고 있다.
좋은 아파트’ 하면 복부인이나 투기꾼 등 나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던 1990년대 후반에는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광고를 맡았다.
이지희 대표는 김남주를 모델로 ‘그녀의 프리미엄 프루지오, 모두가 그녀를 따라 한다. 그런 그녀가 프루지오로 이사가자고 한다. 그녀의 프리미엄 프루지오”라는 카피로 ‘좋은 아파트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2004년에는 교보생명 기업PR 광고로 또 한번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을 수상하는데 이 광고는 최민식이 등장하는 ‘마음의 힘’ 시리즈다. 세계적 금융위기로 어수선하던 시절, ‘당신의 마음에 힘이 되는 노래가 있습니까?’라는 광고 카피와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었다.
日 덴츠사 연수, 세계 정상급 광고업무 체험
그녀는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재학중, 광고 분야에 강의를 듣다가 영국 출신의 세계적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의 책을 접한 후 광고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광고인이 참 잘사는구나. 이상적인 삶을 살면서도 돈도 많이 벌고~’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시작된 관심이 두산그룹 계열의 광고회사 오리콤에 입사하면서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80년대 초반인 당시엔 광고회사들 중에서 여성을 채용하는 곳이 드물어서 여러 군데 낙방하기도 했고 아버지 지인의 힘도 빌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리콤에서 광고인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입사 4년차인 1987년, 아직까지도 남녀차별이 있던 시절에 회사 안팎으로 경쟁이 치열하던 광고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대표는 사장에게 해외 유학을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학이 안되면 연수라도 가게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리자 사장이 소르본드 대학 동문인 일본 덴츠사의 고구레 사장에게 편지를 써준다. 비록 퇴사하고 가는 조건의 연수였지만, 당시로서는 오리콤에서도 덴츠에서도 첫 케이스였다고 한다.
<광고대상 금상 수상작, 임은경 ‘토마토’(2002년)>
1987년 9개월동안의 덴츠 연수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마음껏 새로운 것들을 배웠던 좋은 시기였다. 당시 일본은 전세계 광고계를 휘어잡던 시절이었고, 그 중심이 덴츠사였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광고회사에서 연수를 한 셈이었다. 카피라이터 본부에만 42명이 근무할 만큼 규모도 컸다."
"덴츠 사장이 연수를 허락한 첫 케이스이다보니 직원들도 모두 나에게 우호적이고 적극적으로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가르쳐줬다. 송별회 때 들어보니 그들은 내가 한국의 유력한 집안의 딸인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공무원 출신으로 건설회사의 임원이어서 중산층 이상의 환경이긴 했지만 재벌이나 세력가의 집안이 아닌데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덴츠사장이 허락한 첫 개인 연수생인데다,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옷(진태옥)만 일본에 가져가서 입었더니 그렇게 오해들을 한 것같았다(웃음).”
연수를 마치고 오리콤에 복직한 이지희씨는 덴츠에서 배운대로 ‘카피라이터가 돋보이기 위해서는 디자인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실천했다. 오리콤에서 성격이 몹시 까다로워 함께 하기를 피하는, 그러나 실력이 좋은 디자이너와 파트너십을 자청했다.
여전히 광고회사에 여성이 드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화장품, 생리대 등 여성 관련 제품들의 광고는 다 이대표가 맡았다. 피어리스, LG생활건강, 아모레 퍼시픽(마몽드, 라네즈, 이니스프리)이 그의 담당이었고 헉슬리는 1년동안 기획, 개발에서 광고까지 일괄 담당했다.
광고인은 시대를 향해 ‘왜’라고 묻는 사람
‘오리콤의 싸움닭’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여성으로서 광고계에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력하다보니 입사 7~8년차에 차장, 12년차에 여성 최초로 부장이 되었다.
- 광고분야 중에서도 카피라이터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는지?
“학창시절 백일장에 나가면 장원은 못돼도 가작이나 장려상은 꼭 받았다. 나에게 (카피라이터에게 필요한) 어느 정도의 글재주는 있다고 생각했다. 광고계는 회사 바깥에서뿐 아니라 회사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한데,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제 어느때 올지 모르는 기회를 위해서 매사에 준비를 철저히 한 편이다."
"한번은 피어리스 임원과 사장 앞에서 PT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막내라서 PT용 이젤 세우는 거 도와줄 때였다. 그때 사장이 오리콤의 PT내용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나를 가리키면서 ”자네 생각은 어때?“ 하면서 질문을 던졌는데 마침 내가 준비했던 내용이었다."
그러자 “자네가 제일 낫구만~!”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카피라이터로 인정받고 큰 프로젝트도 맡기 시작했다. 나의 카피가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고, 이를 계기로 평생 카피라이터의 길을 가게 되었다.”
2008년, 25년간의 카피라이터 생활을 마치고 웰컴사의 부사장으로 옮겼다. 이때 그는 “내 광고 수명이 3년쯤 남았구나. 디지털 모르면 광고수명도 끝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광고는 시대를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디지털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이때 디지털을 모르니 죽을 것같더라는 것.
그때 디지털 분야에서 제일 잘하는 곳으로 알려진 포스트 비주얼을 스스로 찾아갔다. 웰컴이라는 큰 회사 부사장이 직원이 19명 정도인 작은 회사로 찾아가서 함께 일하자고 한 것이다. 급여는 절반도 안되게 줄었지만, 지분 참여(20%) 조건으로 기존의 대표였던 부부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CJ 쁘띠첼(젤리)을 젊은 여성의 디저트로 이미지 전환하는 기획으로 대기업 회사들을 물리치고 광고를 수주하는 등 디지털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기존의 광고를 접목하자 여기서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대표는 기술과 미디어가 변해도 광고를 제대로 알면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체험한다.
일반 광고업계에서 25년, 디지털업계에서 6년 등 양쪽을 다 경험한 이지희 대표는 2016년, W camp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웰컴시티의 11개사와 협업하며 설립했는데, 지금은 외부 프리랜서와도 활발하게 협업을 하고 있다.
회사의 규모를 키우지 않는 대신 협업을 통해 기존의 광고 기획 및 제작은 물론 기업 컨설팅과 아기 젖병 살균 세척기(쪼비와 쪼비박스) 등을 특허내고 제조 유통까지 맡는 등 훨씬 다양하고 폭넓게 사업을 펼치고 있다.
-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일까?
“광고란 전통매체부터 웹, 소셜, 모바일까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법 중 최적의 것을 조합하여 소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광고인은, 평생 이 시대에 ‘왜’ 라고 묻는 사람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우리 사회를 보며 ‘왜’라고 물으며 살 것이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