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해도 광고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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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광고의 전설 ‘지오다노’ 만든 시대의 카피라이터 ‘W camp’ 이지희 대표


 

신나는 사이키뮤직이 배경으로 깔린 클럽.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춤에 무아지경에 빠진다. 클로즈업되는 한 쌍의 커플. 고혹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유혹하는 여성, 상대 남성이 여성의 머리를 팔로 끌어당겨 감싸 안는다.

여기에 과감한 의상도 한몫 톡톡히 하는 파격적인 영상의 2004년도 ‘지오다노’ 광고. 전지현과 정우성이 주인공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파격적 연출의 이 CF 동영상은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처음부터 방송 불가를 예상했던 광고다. 당시엔 심의가 지나치게 엄격해서 ‘지오다노’의 새로운 콘셉트(기본 아이템으로 레이어드 착장해 섹시하고 스타일리시하게 입어라)를 전달하기 어려웠다."

"전지현이 컨셉을 이해하고 잘 표현해줘서 결과가 좋았다. 당시 젊은 친구들이 PC 바탕화면에 영상을 깔아놓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때부터 전지현은 최고의 광고모델이었고 현재도 그녀만한 모델은 찾을 수 없다. 프로정신이 완벽한, 최강의 셀럽이다.”

당시 ‘지오다노’ 광고를 기획, 제작했던 W camp 이지희 대표의 말이다.

이지희 대표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21년째 ‘지오다노’ 광고를 맡고 있다. 부침이 심한 패션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20년 이상 브랜드의 광고를 한 기획자가 맡고 있다는 점도 이례적이지만, 그동안 선보인 광고들이 시즌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것도 그렇다.

‘방송 불가’도 불사했을 만큼, 콘셉트 표현에 철저했던 이지희 대표는 2008년에는 9분 50초에 달하는 미니 드라마 형식의 광고도 제작했다. 전지현과 정우성 장동건의 삼각 러브 라인이 그려지는 내용이다.

TV CF용이 아니라 웹 사이트를 통해 지오다노 매장에서 선보였던, 애초부터 미디어 접근이 달랐던 광고로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신민아와 정우성 소지섭 광고(2013)>

<신민아와 정우성 소지섭 광고(2013)>

- 한 브랜드의 광고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비결이 궁금하다.

“첫 광고가 1999년 1월이었다. 당시 각 브랜드 제품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어 이미지로 광고하기 좋은 시기였다. 광고 의뢰를 받고 나서 ‘지오다노만의 이미지 만들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한 끝에 영화 화법으로 풀자고 방향을 잡았다. 젊은 층이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를 모두 조사했고, 모델은 톱스타로 쓰기로 했다."

"첫 모델로 정우성을 선택한 것은 당시 영화 ‘비트’가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흰 셔츠를 입히고 비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장면을 쓰자’고 정한 뒤 신문의 양쪽 전면을 통으로 채워 어떠한 광고 문구 없이 ‘지오다노’만 넣었다. 당시 양 전면 광고는 자동차 광고 외에는 거의 없었고 패션 광고에서는 첫 시도였다.”

정우성은 ‘지오다노 광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정우성 뿐 아니라 고소영, 전지현, 장동건, 소지섭, 신민아, 김우빈 등 그동안 ‘지오다노’ 광고에 출연했던 모델은 모두 쟁쟁한 톱스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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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방송불가 판정받은 지오다노 광고>

“모델은 당대의 톱 영화배우를 중심으로 캐스팅했지만 인기만 있다고 해서 캐스팅했던 건 아니다. 소위 직업의식이 뚜렷한 프로페셔널을 뽑았다. 배우로서 손색이 없고 실력을 갖춘 인물인지 검증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니다."

"가격에 비해 가성비가 좋은 ‘지오다노’와 어우러지기 위해 새로운 프리미엄을 표현해줄 수 있는 명품배우,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셀럽이 필요했다. 스타일이 살지 않아 메인 광고에 노출되지 않았지만 국민배우 최민식씨도 ‘지오다노’ 모델이었고, 드렁큰타이거도 소지섭도 함께 했다.”

지오다노 광고가 주목받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홍콩 브랜드인 ‘지오다노’가 소비자들에게 국내 토종 브랜드로 인식되도록 한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은 인식의 싸움이다. 국내 소비자에게 홍콩의 패션 브랜드가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요소는 아니다. ‘지오다노’가 만약 파리나 밀라노,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패션브랜드였다면 광고전략도 달라졌을 것이다."

"철저히 국내 소비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톱클래스의 영화배우로 모델을 정한 것도 이같은 핵심적인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홍콩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도록 한국 최고의 캐주얼로 인식되게 하고 싶었다.”

그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광고”여서 특별히 애착이 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오다노’ 광고는 ‘한준석 사장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파격적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두 수용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준석 사장은 톱스타와 당대 최고의 CF감독, A급 스타일리스트를 동원할 수 있도록 제작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광고 카피로 문제의 해답을 주다

지오다노 광고가 패션 광고의 전설이라면, 이지희 대표 역시 광고업계 특히 카피라이터 마켓에서는 신화적인 존재로 손꼽힌다.

그녀는 지난 1984년 오리콤에 입사해 광고 업계에 입문한 후 웰컴 부사장과 포스트비주얼 공동대표, 현재의 W camp 대표에 이르기까지 35년간 광고인의 길을 걸어왔다. 소비자들의 기억에 남는 새로운 시도로 국내외에서 굵직굵직한 광고상도 많이 받았다.

먼저 입사 6년차인 1989년, 쁘렝땅백화점의 지하철 광고로 생애 첫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을 수상한다. 이 광고는 지하철 S타입(칸의 중간쯤 위쪽에 있는 공간)에 ‘여러분은 지금 쁘렝땅백화점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계십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것으로, 당시 쁘렝땅백화점이 을지로3가에 숨어 있어 장소를 강조한 광고다. 신생 백화점의 가장 큰 고민을 광고문구로 해결해준 셈이다. 당시 장소를 강조하는 유형의 첫 케이스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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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파트’ 하면 복부인이나 투기꾼 등 나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던 1990년대 후반에는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광고를 맡았다.

이지희 대표는 김남주를 모델로 ‘그녀의 프리미엄 프루지오, 모두가 그녀를 따라 한다. 그런 그녀가 프루지오로 이사가자고 한다. 그녀의 프리미엄 프루지오”라는 카피로 ‘좋은 아파트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2004년에는 교보생명 기업PR 광고로 또 한번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을 수상하는데 이 광고는 최민식이 등장하는 ‘마음의 힘’ 시리즈다. 세계적 금융위기로 어수선하던 시절, ‘당신의 마음에 힘이 되는 노래가 있습니까?’라는 광고 카피와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었다.

日 덴츠사 연수, 세계 정상급 광고업무 체험

그녀는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재학중, 광고 분야에 강의를 듣다가 영국 출신의 세계적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의 책을 접한 후 광고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광고인이 참 잘사는구나. 이상적인 삶을 살면서도 돈도 많이 벌고~’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시작된 관심이 두산그룹 계열의 광고회사 오리콤에 입사하면서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80년대 초반인 당시엔 광고회사들 중에서 여성을 채용하는 곳이 드물어서 여러 군데 낙방하기도 했고 아버지 지인의 힘도 빌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리콤에서 광고인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입사 4년차인 1987년, 아직까지도 남녀차별이 있던 시절에 회사 안팎으로 경쟁이 치열하던 광고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대표는 사장에게 해외 유학을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학이 안되면 연수라도 가게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리자 사장이 소르본드 대학 동문인 일본 덴츠사의 고구레 사장에게 편지를 써준다. 비록 퇴사하고 가는 조건의 연수였지만, 당시로서는 오리콤에서도 덴츠에서도 첫 케이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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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대상 금상 수상작, 임은경 ‘토마토’(2002년)>

1987년 9개월동안의 덴츠 연수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마음껏 새로운 것들을 배웠던 좋은 시기였다. 당시 일본은 전세계 광고계를 휘어잡던 시절이었고, 그 중심이 덴츠사였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광고회사에서 연수를 한 셈이었다. 카피라이터 본부에만 42명이 근무할 만큼 규모도 컸다."

"덴츠 사장이 연수를 허락한 첫 케이스이다보니 직원들도 모두 나에게 우호적이고 적극적으로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가르쳐줬다. 송별회 때 들어보니 그들은 내가 한국의 유력한 집안의 딸인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공무원 출신으로 건설회사의 임원이어서 중산층 이상의 환경이긴 했지만 재벌이나 세력가의 집안이 아닌데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덴츠사장이 허락한 첫 개인 연수생인데다,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옷(진태옥)만 일본에 가져가서 입었더니 그렇게 오해들을 한 것같았다(웃음).”

연수를 마치고 오리콤에 복직한 이지희씨는 덴츠에서 배운대로 ‘카피라이터가 돋보이기 위해서는 디자인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실천했다. 오리콤에서 성격이 몹시 까다로워 함께 하기를 피하는, 그러나 실력이 좋은 디자이너와 파트너십을 자청했다.

여전히 광고회사에 여성이 드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화장품, 생리대 등 여성 관련 제품들의 광고는 다 이대표가 맡았다. 피어리스, LG생활건강, 아모레 퍼시픽(마몽드, 라네즈, 이니스프리)이 그의 담당이었고 헉슬리는 1년동안 기획, 개발에서 광고까지 일괄 담당했다.

광고인은 시대를 향해 ‘왜’라고 묻는 사람

‘오리콤의 싸움닭’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여성으로서 광고계에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력하다보니 입사 7~8년차에 차장, 12년차에 여성 최초로 부장이 되었다.

- 광고분야 중에서도 카피라이터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는지?

“학창시절 백일장에 나가면 장원은 못돼도 가작이나 장려상은 꼭 받았다. 나에게 (카피라이터에게 필요한) 어느 정도의 글재주는 있다고 생각했다. 광고계는 회사 바깥에서뿐 아니라 회사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한데,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제 어느때 올지 모르는 기회를 위해서 매사에 준비를 철저히 한 편이다."

"한번은 피어리스 임원과 사장 앞에서 PT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막내라서 PT용 이젤 세우는 거 도와줄 때였다. 그때 사장이 오리콤의 PT내용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나를 가리키면서 ”자네 생각은 어때?“ 하면서 질문을 던졌는데 마침 내가 준비했던 내용이었다."

그러자 “자네가 제일 낫구만~!”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카피라이터로 인정받고 큰 프로젝트도 맡기 시작했다. 나의 카피가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고, 이를 계기로 평생 카피라이터의 길을 가게 되었다.”

2008년, 25년간의 카피라이터 생활을 마치고 웰컴사의 부사장으로 옮겼다. 이때 그는 “내 광고 수명이 3년쯤 남았구나. 디지털 모르면 광고수명도 끝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광고는 시대를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디지털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이때 디지털을 모르니 죽을 것같더라는 것.

그때 디지털 분야에서 제일 잘하는 곳으로 알려진 포스트 비주얼을 스스로 찾아갔다. 웰컴이라는 큰 회사 부사장이 직원이 19명 정도인 작은 회사로 찾아가서 함께 일하자고 한 것이다. 급여는 절반도 안되게 줄었지만, 지분 참여(20%) 조건으로 기존의 대표였던 부부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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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쁘띠첼(젤리)을 젊은 여성의 디저트로 이미지 전환하는 기획으로 대기업 회사들을 물리치고 광고를 수주하는 등 디지털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기존의 광고를 접목하자 여기서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대표는 기술과 미디어가 변해도 광고를 제대로 알면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체험한다.

일반 광고업계에서 25년, 디지털업계에서 6년 등 양쪽을 다 경험한 이지희 대표는 2016년, W camp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웰컴시티의 11개사와 협업하며 설립했는데, 지금은 외부 프리랜서와도 활발하게 협업을 하고 있다.

회사의 규모를 키우지 않는 대신 협업을 통해 기존의 광고 기획 및 제작은 물론 기업 컨설팅과 아기 젖병 살균 세척기(쪼비와 쪼비박스) 등을 특허내고 제조 유통까지 맡는 등 훨씬 다양하고 폭넓게 사업을 펼치고 있다.

-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일까?

“광고란 전통매체부터 웹, 소셜, 모바일까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법 중 최적의 것을 조합하여 소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광고인은, 평생 이 시대에 ‘왜’ 라고 묻는 사람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우리 사회를 보며 ‘왜’라고 물으며 살 것이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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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일, 재미삼아 하는 일, 남을 돕는 일, 나 자신을 위한 일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된다. 일 하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분류로 나뉜다. 그러나 지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려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과 찾지 못한 사람’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한 사람은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직장을 다닐테고,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에게는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이 찾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 까지 벌수 있다면 최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로 돈까지 벌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패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극히 생소한 일이었다.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주변에 패션 디자이너나 패션 기업인도 잘 없다.

아마 패션 업체에 다니는 사람을 지인으로 두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패션을 업(業)으로 삼고 옷을 만들어 돈을 버는 패션 사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이 아니었다.

물론 이 다음부터 소개하려는 분들이 ‘아무나’는 아니었다. 혹자는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 10%의 노력과 90%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었다.

좋아하다 일이 되다

덕업일치라는 말은 생소했다. ‘오타쿠’라는 일본어는 한 가지에 몰두해 대인관계도 없이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하는 은둔형 외톨이(히끼꼬모리)와 맥을 같이한다. 이를 다소 부정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던 지라 이에서 파생된 오덕, 덕후, 덕질 이라는 단어들도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 분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전문가가 된, 어쩌면 누구보다 그 분야를 잘 아는, 그런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뜻의 ‘덕업일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미디어에서는 ‘덕업일치 란 없다. 그냥 상황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궁금증에서 출발한 취재는 빠르게 진행됐다.

여러 채널을 통해 이 같은 사람을 수소문했고, 어렵게 패션 관련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고 있는 몇 명의 덕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이를 사업화하고, 플랫폼을 만들고 있으며,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임몬타나의 최영훈 대표, 와디의 신발장 유튜버 고영대,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 유니페어 강재영 대표 등 덕업일치를 이룬 덕후들을 만나봤다.

그들은 어떻게 덕업일치를 이뤄냈을까.


안경 수집 덕후, 안경을 만들다

‘프레임 몬타나’ 최영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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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8만 팔로워를 거느린 최영훈 대표(이하 몬타나최)는 패션과 관련 제품들을 수집하는 덕후였다. 옷을 좋아해서 코치넬리 등 이태리 유명 브랜드는 물론 안경, 시계, 나이키 운동화 등 출장을 다니며 여러 제품을 수집했고, 그 제품들을 보면서 공부했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에 2년 간 근무하다 회사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 MBA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경영컨설팅을 하다 케미칼 회사를 차렸다.

몬타나최는 안경을 좋아해 1920년 대 출시됐던 빈티지 안경테부터 여러 클래식 뿔테들을 수집했다. 수많은 레퍼런스를 모으고, 아름다움을 배우고, 느끼면서 미적 감각을 키웠다. 수집이 힘이 됐다. 좋아서 모으기는 했지만 안경을 만드는 데는 전혀 지식이 없었다.

케미칼 사업은 매출 규모는 커도 수익률이 그리 높지 않아, 큰돈을 만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새로운 사업을 고민하던 중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업의 시작이 되었다.

아이템을 고민하다 보니, 옷도 너무 잘 만드는 브랜드가 많아 자신이 없었고, 신발도, 액세서리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안경이 떠올랐다. 내가 쓰고 싶은 안경을 찾아봐도 클래식하고 빈티지한 전문 브랜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은 재고 문제도 있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경은 10년 넘게는 클래식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계속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도 많이 안 들고. 현실적으로 기존 브랜드들과 차별화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몬타나 최는 자신이 직접 안경을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한 후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는 연결 고리 하나 없이 일본 안경 생산의 메카인 후쿠이현 사바이 시에 메일을 보내 안경 제조 업체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몇 개 업체를 소개 받아 직접 방문했다. 프로토 타입 제작을 맡겨 가장 잘 만든 업체를 선정하고 제품 생산을 맡겼다.

그는 “운이 좋았다. 선택한 업체가 사기꾼이었다면 프레임몬타나는 지금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정직한 업체였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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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칭 당일 3억원 매출

이렇게 만들어진 안경 브랜드 ‘프레임몬타나’는 그 행보 자체가 놀라웠다. 론칭 당일,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3억원 어치 제품이 팔려나갔다. 30만 원 상당의 제품 1천 개가 24시간 동안 판매됐다.

프렌치 스타일 안경테 ‘크라운 판토’는 안경 윗부분이 각이 진 제품인데 현재 대부분의 안경 브랜드가 이를 따라한 제품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프레임몬타나’는 순식간에 유명 브랜드가 됐고, 60개 안경점에 입점했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프레임몬타나의 종이안경 서비스. 안경의 경우 써 보지 않고 구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종이로 안경 모형을 만들어 원하는 고객에게 보내주었다.

고객은 종이 안경을 자신의 얼굴에 대보고 원하는 제품을 골라 온라인에서 주문하는 방식이다. 종이 안경은 모두 고객에게 제공한다. 이는 순수하게 프레임몬타나 팀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서비스가 단번에 높은 매출을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몬타나최’의 안경 사랑은 비즈니스가 됐다.


프랑스도 인정한 토종 브랜드

몬타나최는 프레임몬타나의 준비 과정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두 공개했다. 어떻게 브랜드가 만들어지는지 공개하는 것은 다소 리스크도 있었지만 재미 있는 정보를 팔로워들에게 제공했다.

처음부터 팔로워들을 비즈니스 모델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채널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팔로워들은 점점 늘었고 그들에게 더 많은 정보들을 제공했다.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 결과 사진을 찍는 것조차 싫어했던 그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가 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SNS를 통해 비즈니스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두 달 전 프랑스 안경 전시회 ‘실모(SILMO)’에 참여해 전 세계 안경 전문가들로 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실제로 전시회에 참여하는 안경 브랜드들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작은 신규 브랜드가 빅이슈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프레임몬타나는 유럽 지역 5개 유명 안경 셀렉숍에 입점하게 됐다.

최영훈 대표는 “안경으로 유명하지도 않은 나라의 작은 브랜드가 이런 반응을 얻은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글로벌 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프레임몬타나는 유럽 에이전시를 두고 영업망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하우스 비즈니스에서 진짜 기업으로

프레임몬타나는 처음 12개 모델로 시작했다. 지금은 15개로 늘었다. 선글라스 1개를 포함하면 16개. 내년에는 17개로 늘리고 티타늄 모델도 3개를 추가한다. 스타일 수를 늘리고 하우스 브랜드의 느낌을 살려 고가로 전개한다.

이와는 별도로 세컨 브랜드를 론칭한다. 가격대를 합리적으로 책정해 좋은 안경을 더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물론, 돋보기 안경, 캐주얼 안경 등 약 200개 정도의 스타일을 구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 달 중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한다. 모인 자금으로 프레임몬타나주니어(가칭)을 론칭해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물론 온라인도 병행한다.

최근에는 킥스몬타나 브랜드 사업도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모아온 나이키 빈티지 스니커즈를 판매하고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제품들을 프레임몬타나와 함께 전시했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나이키 마니아들이 몬타나최를 찾아오고 있었다.


쉽지 않은 덕업일치

어려움도 있었다. 혹자는 먹고 살만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모으다가,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돈을 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물론 아이템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했지만 ‘잘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했다. ‘프레임몬타나’가 망했다면 자금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가 좋게 나와 다행이다. 덕업일치로 사업이 될지 전혀 몰랐다.

5년 전만해도 월급쟁이였다. 빨리 승진하고 사장이 되고 싶은 우리 세대의 가치만 쫓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삶이 180도 달라졌다. 성공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와 자신도 빨리 성공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도 좋아하는 일을 찾는 데 20년이 걸렸다.

너무 조바심내지 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재밌게 하다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다. 덕업일치는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덕업일치를 이루고 행복 지수가 높아졌다고 한다. 마지못해 밤을 새던 직장생활과 비교하면 지금은 밤을 새서 일하더라도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자신의 라이프가 훨씬 나아졌다며 웃음을 보였다.


신발 덕후, 스니커 마니아들의 장(場)을 만들다

‘와디의 신발장’ 유튜버 고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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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디, 휠라를 만나다 >

스니커즈 마니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 스니커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알려진 유튜버가 있다.

와디의 신발장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유튜버 고영대 씨(이후 와디)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이다. 내부 조직과 외부 조직을 연결하고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드는 일을 한다.

어려서 부터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금도 회사에서 판을 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그의 방송은 재미있고 신선했다.

신발 덕후가 만든 스니커즈 팬덤

와디가 자신의 본업 외에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것은 단지 신발을 좋아해서 이다. 자신이 관심있는 내용들을 영상에 담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발에 대한 영상만 조회수가 높게 나왔다. 이에 아이디어를 얻은 와디는 채널 이름을 ‘와디의 신발장’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신발 방송을 시작했다.

영상학을 전공해 영상 편집도 빠르다. 그의 영상에는 효과도, 텍스트도 없다. 영상만이 있을 뿐이다. 17분을 찍으면 15분 영상을 올린다. 숨소리만 편집해서 내보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운동화 밑창을 닳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는 ‘슈구’ 사용법부터 시작해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했다. 자신이 모은 신발은 300족, 새것은 100족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신발들을 리뷰를 하면서 스니커즈 마니아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아 지금 구독자수는 10만을 훌쩍 넘었다.

와디가 지금까지 올린 영상은 1천개가 넘는다.

그는 퇴근하고 아이들을 재운 10시가 넘으면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신발을 영상에 담아 올리는데 까지 1시간을 투자한다. 주말에도 가족과 함께 하고 남는 시간에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스니커즈 전문가로 유명해 지자 여러 비즈니스적인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디는 어렸을 적 부터 좋아했던 싱가포르의 나이키 외주 디자이너 사포타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만나 협업을 제안했다. 함께 옷을 만들고 이를 판매한 수익은 기부했다.

&lt;지난 11월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스니커 매니아들의 행사 ‘스니커하우스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단체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Photo 스택하우스&gt;

<지난 11월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스니커 매니아들의 행사 ‘스니커하우스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단체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Photo 스택하우스>

스니커즈 행사에 3천 8백명 몰려

현재 국내에는 이렇다할 스니커즈 행사가 없다고 한다. 해외에는 컨플렉스콘, 스니커콘 등 마니아들이 참여해 리미티드 제품을 구경하고 이를 즐기는 행사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국내에도 스니커즈 마니아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기획하기에 이른다.

와디는 구독자가 3만에 달했을 때 자신 혼자 직접 조금씩 돈을 모아 행사를 기획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장소를 제공하기로 했던 업체와 틀어지면서 행사 개최는 물거품이 될 뻔했다. 그 때 미국에서 국내에 스니커즈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 넘어 온 스택하우스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와 함께 하자” 와디는 스택하우스와 손 잡고 ‘스니커하우스’라는 행사를 만들었다. 강남에서 열린 첫 회 행사에는 300명이 왔다. 이 후 입소문이 퍼지면서 늘어나기 시작해 4차 행사에는 3천 8백 명의 마니아들이 몰렸다.

올 해 용산에서 연 스니커하우스 번외편 캠프에도 2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렸다. 여기서는 청주 크래프트 비어 브랜드 칠홉스와 협업해 이 행사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수제맥주를 신발 박스에 넣어 판매했다. 바로 완판. 수익금은 기증했다.

스니커하우스 3차 행사때 특수 염료 회사와 손잡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얼굴 문양을 넣은 티셔츠를 만들었다. 빛을 받으면 얼굴 문양이 빨갛게 바뀌는 효과가 있다. 물론 40분 만에 완판했다. 수익금으로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20만원 상당의 나이키 운동화를 돌렸다.

국내에도 유명 스니커즈마니아 행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규모로는 일본의 아트모스콘을 압도했다. 스니커하우스에서는 희귀 스니커즈를 전시하고, 리셀러들은 제품을 팔며,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다. 스니커즈 인디 브랜드도 참여하는 스니커즈와 스트리트 문화를 공유하는 행사이다.

와디는 이 행사에서 공개방송도 진행하고 스니커즈를 주제로한 토론과 토크쇼도 진행해 이목을 끌었다.

와디는 “실제 미국의 컴플렉스콘에는 굉장히 많은 브랜드의 협업 제품이 출시된다. 그 곳에서만 판매하는 제품을 구경하고 사기위해 마니아들은 하루에 80달러를 내고 들어간다. 물론 제품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의 시작, 휠라와의 만남

휠라의 제안을 받은 와디는 흔쾌히 승낙했다. 휠라와 와디의 협업 소식은 스니커즈 마니아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휠라는 와디에게 휠라의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아카이브를 모두 보여주었고 와디는 그 중 자신이 원하는 소재와 색상을 제안했다. 휠라는 이를 바탕으로 협업 제품을 만들었다.

수량은 단 100족. 와디의 주문 사항이었다. 이 제품은 휠라 플래그십 스토어 한 군데, 공식홈페이지, 무신사를 통해서만 판매됐다. 휠라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출시 전날 밤 12시 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 발매 즉시 50족 모두 완판, 무신사와 공홈에서는 50족이 1초만에 완판됐다.

와디는 휠라 매장 앞에 마니아들을 줄 서게 했고, 희소성을 극도로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이 제품의 가격은 6만 9천원. 발매 다음 날 리세일 시장에서 세 배가 넘는 15만원에서 많게는 20만원 상당의 가격으로 거래 되었다고 한다.

와디는 휠라와의 협업에 대해 “마니아가 할 수 있는 덕질의 끝을 경험했다. 행복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와디는 스니커즈 전문 서적도 출간했다. 국내 유명 스니커헤드 10명과 함께 스니커 100선을 담았다. 와디는 일본에 갔을 때 서점에 들렀다 큰 충격을 받았다. 서점 한 벽면 책장이 모두 스니커즈 관련 책 이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스니커즈 시장이 작지 않은데 왜 전문 서적이 없을까 생각하다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하고 국내 처음으로 스니커즈 관련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마니아들에게만 팔렸지만 마니아들은 이 책을 쓴 스니커헤드를 만나 책에 사인을 받기도 하고 그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와디는 휠라와 두 번째 협업도 추진 중이다. 시점과 방법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

&lt;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국내 유일 스니커즈 행사 스니커 하우스&gt;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국내 유일 스니커즈 행사 스니커 하우스>

덕질로 번 돈, 좋은 일에 쓰기

와디는 자신의 유명세로 번 돈을 좋은 일에 쓰고 있다.

와디는 스니커하우스 행사에서 자신의 신발 중 제일 비싼 것을 내놓아 경매 수익금으로 운동화를 구매해 고아원의 중고 남학생에게 선물했다. 고아원 한 아이당 일 년에 신발 구매 비용은 약 10만원 정도라고 한다. 와디는 나이키 조던맥스, 아디다스 울트라부스트 등 고가의 제품으로 전부 다른 모델에 색도 모두 다르게 사줬다.

이 후 프랑스 패닉피자클럽 이라는 브랜드에서 연락이 와 함께 제품을 만들어 여자아이들 것도 사주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제품 역시 하루만에 품절됐다. 그 수익금으로 초등학생까지 모두 사주었다.

운동화를 구매할 때도 온더스팟, 아트모스 같은 온라인 스토어에서 50% 할인해 주면서 더 많은 제품을 고아원 아이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에서 60만원 상당의 패딩 4개를 증정해줘 지난 달 30일 증정식을 가지기도 했다.

“좋은 기운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의 고아원에 다른 이벤트로 수익을 내 또 좋은 운동화를 주고 싶다. 내가 특별히 들이는 것 없이 마니아들은 굿즈를 구매해서 좋고 아이들도 좋고 서로서로 좋은일 인 듯하다”


와디는 회사일도 즐겁게

와디는 회사일도 즐겁게 한다. 양쪽일 모두 만족하면서 자아실현도 하고 있다. 유튜브도 재밌고 회사일도 좋다. 주말에는 행사와 파티에 참석해 힐링하고, 독자들과 스니커즈 브랜드가 보내주는 신발은 하루에 하나씩 택배로 온다.

한 가지 고민은 지금처럼 두 가지 일을 함께 해야 할지 유튜버와 행사 기획에 집중해야 할지다.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를 업으로 할 경우 수입에 대한 스트레스로 스니커즈에 대한 열정이 식을 수도 있을까 걱정도 되기 때문이다.

미국 컨플렉스 스니커 채널은 음악과 스니커즈를 엮어 새로문 문화 채널을 만들고 있다. 와디는 우리나라의 멋진 장소와 함께 스니커즈를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구독자들의 반발 없이 방송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을 항상 고민한다.

와디는 “옷이든 신발이든 내가 소개하는 제품들은 나만의 굿즈일 뿐이다. 문화를 움직이는 브랜드가 될 수는 없다. 내 역할은 스니커즈 전문 브랜드를 응원하면서 함께 만들고도 싶고, 스니커즈 시장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국내에서도 아이앱스튜디오, 99%is, 피스 마이너스원 등 같은 브랜드들이 많이 나와서 함께 스니커즈 시장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부산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세계의 편집숍에 입점하는 그런 세상을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자전거 덕후, 바이크웨어를 만들다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

&lt;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가 자신이 매일 타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가 자신이 매일 타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한 자전거 덕후가 바이크웨어를 만들었다.

그 주인공은 아덴바이크를 만든 안형선 대표다. 안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스포츠 마니아였다. 인라인, 자전거 등 운동을 좋아해 남들 공부할 때 운동을 했다. 오클리 선글라스도 좋아했다.

당시 국내에 오클리 선글라스가 판매되지 않고 있어 이 제품을 수입해 알음알음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 개를 팔면 7~8만원이 남았다고 한다. 판 돈으로 두개를 사고 두개 팔아 남은 돈으로 또 5개를 사고, 그러면서 월 수익은 100만원을 넘었다.

처음에는 중고로 사서 판매하다 오클리 선글라스 수입 업체를 직접 찾아가, 판매 대행을 요청했다. 업체는 흔쾌히 제품을 공급해 주었고 안 대표는 선글라스를 인터넷 오픈마켓에 팔며 종잣돈을 모았다. 안 대표가 이를 잘 팔자 오클리 미국 본사에서 연락이 와 직접 팔아달라고 했고, 더 큰 사업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사다

대학교 때 번 돈으로 비싼 자전거를 구매했다. 그 나이 또래에 살 수 없는 MTB 자전거를 사서 실컷 타고 다녔다. 이후 자전거 용품, 미국에서 유행하는 디스커버리, 나이키 등 팀복을 사다 팔았다. 팀복은 뜨루드 프랑스, 레플리카 등 선수들이 입는 옷이다.

섬유공학을 전공한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원단 회사에 들어갔다. 원단 회사에서 갭, 올드네이비, 신성통상, 이랜드, 리바이스 등 다양한 기업과 거래했다. 회사생활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월급도 작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3년 쯤 다녔을까.

안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새벽 3시까지 병행 수입 일을 하면서 내 사업을 위한 돈을 모았다. 매월 1천만 원씩 벌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돈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보람이 없었다. 내 일을 내가 직접하면 효율적으로 내 시간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쓰러질 때까지 밤새 일해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자전거. 그러나 자전거 옷은 입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는 예뻣지만 너무 비싸고, 국내 브랜드는 기능성이나 디자인 면에서 많이 떨어졌다.

자전거를 직접 하면서 어떤 옷이 편한지 알게 됐다.

&lt;안형선 대표가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안형선 대표가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공장을 찾아가다

처음에는 원단 밖에 몰랐기 때문에 패턴이나 공장이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무작정 봉제 공장을 찾아가 옷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시도 많이 당했지만 갖고 있던 돈을 먼저 주고 만들어 달라고 했다.

스타일을 처음에는 2개, 6개, 10개 계속 늘려 나갔다. 수입 사업으로 번 돈을 제조에 투자했다. 1스타일을 소량으로 몇 백장만 만들어도 2천만 원 넘게 들었다. 제품은 직접 활동하던 동호회나 마니아들 위주로 팔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함께 했던 커뮤니티에서도 잘 팔렸다.

국내 판매 제품들은 패션을 무시한 멋이 없는 옷들 뿐이었다. 직접 디자인하고 내가 자전거 타면서 입고 싶은 옷을 만들었다. 원단도 직접 개발했다. 매쉬 원단, 라미네이트필름, 안감 스판트리코트 원단을 붙여 합복을 하는 등 원단을 만들고 봉제공장도 인수해 직접 만들어 원가를 대폭 낮췄다.

패턴도 입체패턴을 적용했다. 자전거 탈 때 자세에 맞춰 팔은 꺾이고 앞판은 울지 않게, 어깨도 안으로 굽어지게 만들었다. 바지 안에 들어가는 패드도 다양하게 수입해 공급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불편한 옷, 자전거 탈 때는 세상 편한 옷이 만들어졌다.

품질은 높이고 단가는 낮추니 자전거 마니아들이 몰렸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드니 고객들도 좋아했다. 내 맘에 안 들면 다른 사람도 안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바이크 마니아 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내 브랜드 중 가장 많이 팔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바이크웨어로는 1등

안 대표는 자전거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도 자전거를 꾸준히 타고 있다. 도로사이클 연맹 같은 조직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조직원들과, 직원들도과도 주기적으로 자전거를 탄다. 매일 아침 40km 씩 자전거를 탄다.

마케팅도 쉬지 않는다. 공식적인 크루를 모집해 연간 300백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 MCT선수들과도 스폰서십을 맺고 옷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내년에는 큰 차를 빌려 자전거 전국 일주도 계획하고 있다.

매장도 열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무조건 자전거 길에서 옷을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 주변에 매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직영점으로 운영하다, 자전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둘씩 대리점으로 운영권을 넘겼다. 그들이 비수기에 매출이 줄어들까 여러가지 아이템도 지원해주고, 커피 등 음료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나만 잘 살기보다 점주들도 돈 잘 벌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대표는 올해 프리미엄 브랜드 ‘치즈 사이클링’을 인수했다. 고급 소재를 사용하고, 디자인도 차별화했다. 인수와 함께 ‘치즈 사이클링’을 론칭했던 멤버도 함께 데려왔다. 그 역시 자전거 덕후이며, 홍대 아티스트 출신이었다. 자전거 웨어에 스트리트 감성을 접목해 독특한 디자인으로 마니아층을 흡수하고 있다.

&lt;안 대표가 자전거 덕후인 직원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안 대표가 자전거 덕후인 직원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직원들도 모두 자전거 덕후

어느 날 한 직업 군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군생활을 그만두고 미국에 가 LA부터 뉴욕까지 자전거 횡단을 하겠다며 옷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안 대표는 옷을 줬고 그는 정말 몇 만 km 거리의 미국을 횡단했다고 한다.

중간 정도 갔을 즘 그는 안 대표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내가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돌아오면 내가 채용해 줄테니 완주하고 돌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 직원은 지금까지도 근무하고 있으며 바이크 선수생활을 하면서 아덴바이크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것도 중요하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그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안 대표의 판단에서 였다. 안 대표는 주말에는 무조건 직원들과 자전거를 타고, 만나는 사람들과 제품을 이야기 하고 건의 사항은 언제든지 제품에 반영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해외 사업도 시작

자전거 웨어 외에 병행 수입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 오클리, 루디 등 을 수입해 판매하고 올 해는 스노우고글도 직접 제조해서 판매할 계획이다. 미국 법인도 세웠다.

과거 수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 법인에서 직구로 국내고객에게 판매하면서 다양한 이점을 가져간다. 판도라, 샘소나이트, 어그부츠 등을 파는 재미도 솔솔하다.

미국 거래량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등 해외 지역에도 디스트리뷰터를 두고 옷을 팔고 있다. 해외 각지에 디스트리뷰터도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계약한다. 대만 친구들은 매년 한국에 와서 부산 서울 까지 함께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CD가 나오면서 카세트가 사라지고 MP3가 나오면서 CD가, 모바일이 나오면서 MP3 사라지지만 자전거는 오토바이, 자동차, 전기 자전거가 나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자전거를 타겠죠. 스노우보드는 어느 정도 보드를 타다 나이가 들면 못타지만 자전거는 나이가 들어도 힘들이지 않고 건강을 지켜주는 좋은 친구 입니다”

자전거 덕후는 그렇게 옷을 만들고 있었다.


클래식 덕후, 클래식이여 영원하라

유니페어 강재영 대표

&lt;강재영 대표. photo 모지웅 기자&gt;

<강재영 대표. photo 모지웅 기자>

옷차림도, 생활 방식도 점점 더 캐주얼해지는 요즘 시대, 어렵게 만들어진 값비싼 신발이 굳이 필요할까요? 그러나 ‘제대로 된 좋은 구두’를 신는다는 것, 일종의 문화를 지키는 태도이자 낭만을 표현하는 세련된 방식과도 같습니다."

"만약 특별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만찬에 격식을 갖춰 입고 신고 간다면, 동행한 상대방은 물론 스스로도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상황에 맞게 입고 신는 태도는, 남자의 일상에 남겨둬도 괜찮은 규율이자, 기분 좋은 우아함입니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고객이 아니라 문화를 동경

신사동 가로수길 안 쪽 골목, 화려한 쇼윈도와 큼지막한 간판이 걸린 주변 매장과는 눈에 띄게 다른 매장이 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블루(엄밀하게 로열 블루)도어가 마치 뉴욕 5번가의 레드도어 살롱을 연상시킨다.

이 곳은 브랜드명 그대로 ‘당신을 위한, 세상에서 단 한 켤레뿐인 구두’를 선보이는 정통 클래식 슈즈 숍 ‘유니페어’다. 에드워드 그린, 존롭, 알든, 파라부트 등 세계적 명성을 가진 수제화와 함께 한국인의 발 모양에 맞춰 자체 제작한 구두, 슈케어 브랜드 ‘릿슈’로 구성되어 있다.

강재영 대표를 만나러 간 날(지난달 29일)에는 마침 영국 최고의 비스포크 슈트 메이커 ‘앤더슨 앤 쉐퍼드(Anderson & Sheppard)’와 비스포크 슈즈 ‘에드워드 그린(Edward Green)’의 합동 트렁크쇼가 열리고 있었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양복’으로도 잘 알려진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cutter)가 예약 고객을 위해 체촌, 가봉을 하고 ‘에드워드 그린’의 MTO, 탑 드로어(Top Drawer), 기성제품 사이즈 오더를 진행하는 행사. 커터가 6개월에 한 번 방문해 2~3차례의 가봉을 해야 하는 까닭에 ‘앤더슨 앤 쉐퍼드’의 슈트 한 벌을 입기 위해서는 최대 1년 반을 기다려야 한다.

&lt;강재영(사진 제일 왼쪽), 강원식 형제가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강재영(사진 제일 왼쪽), 강원식 형제가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진한 싱글 몰트 위스키 향이 가득한 속에 전신 거울 앞에 선 멋쟁이 고객과 체형을 세심하게 체크하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커터. 1년이 넘도록 옷 한 벌을 짓고, 기꺼이 인내하겠다는 그들의 모습은 꽤나 멋있으면서 또 생소했다. 기성복 중에서도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 유명한 브랜드가 적지 않은데 말이다.

강 대표는 “만 11년 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슈트 문화를 알아야 (구두까지) 비로소 클래식 스타일을 즐기고, 갖춰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판매장이 아니라 클래식의 로망이 묻어나는 공간, 이런 문화를 이해하고 향유하고자하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자는 거죠.”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유니페어’는 근대 복식의 원류(源流)이자 클래식 문화의 중심에 있는 유럽의 브랜드를 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번 합동 트렁크쇼도 몇해 전 강 대표가 영국에 찾아가 슈트를 맞추면서 비즈니스 제안을 했던 결과다. 물론 한 번에 협업이 이뤄진건 아니다.

“경험을 해보고 확신이 서면 제대로 전달할 수 있죠. 클래식 슈즈를 공부하려면 슈트를 모를 수가 없어요. ‘앤더슨 앤 쉐퍼드’도 경험해 보는 것이 최고의 학습이라고 생각했죠. 처음엔 그들이 한국에서 뭘 해보겠다는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저희와 먼저 거래를 시작한 ‘에드워드 그린’이 역할을 해줘서 올 1월 삐띠워모에서 만나 뜻을 모았습니다.”

강 대표는 경제적 여유가 클래식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유일 조건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알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속에 경제적 여유는 윤활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은 어떻게 ‘클래식’에 빠졌고, 대박을 기대할 수 없는 시장에서 10년이 넘게 사업을 이어오고 있을까. 강재영 대표는 2008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일 치르꼬’라는 남성용 구두 전문 편집숍을 냈다.

처음에는 가장 먼저 출근해 진열되어 있는 구두를 닦는 일이 그의 업무였다. 2011년 ‘유니페어’로 리뉴얼했고 인큐베이팅한 브랜드 중 ‘드레익스’와 ‘파라부트’는 각각 서울 도산, 한남점을 오픈했다.

올 4월 광주광역시에 생긴 두 번째 ‘유니페어’ 매장은 매니저를 지낸 김해룡 대표가 고향에서 경험과 뜻을 펴 보겠다고 해 열게 된 매장이다.


‘함께 즐거운’ 일을 찾은 형제

강재영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코리아에서 마케터로 일하다 남성용 구두 전문 편집숍 ‘일치르꼬’를 창업하며 패션업계에 뛰어들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와 ‘일을 저지르는게’ 된 데에는 형인 강원식 코넥스솔루션 대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코넥스솔루션은 국내에 ‘착한 패션, 착한 소비’ 바람을 일으킨 슈즈 ‘탐스’를 도입했고 그라미치, 유니버셜 오버롤즈, 와일드씽즈 등 마니아층이 탄탄한 브랜드를 소개해 온 회사. 올 여름에는 형제가 함께 포토저널리즘의 효시가 된 매거진 ‘라이프’의 서브 라이선시로 제조업에도 도전했다.

강 대표는 “함께 좋아하는 것을 해왔다”고 이야기한다. 브랜드 스토리와 퀄리티에 호감이 생기면 제품을 먼저 사서 입거나 신어 보고 사용하면서 ‘공부’를 먼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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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부터 형과 함께 ‘나이키 에어조던’ 시리즈를 모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 ‘나이키 덕후’였고,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나가 ‘맨즈논노’를 구해 보면서 ‘우리에겐 왜 이런 멋진 남자 옷이 없을까’ 아쉬워했던 것이 사업으로 이어졌다는 설명.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덕질은 느리지만 차곡차곡 영글고 있다. ‘유니페어’는 신세계인터내셔날 자사몰인 ‘에스아이빌리지’에 입점한데 이어 올 가을 신세계백화점의 남성 편집숍 ‘맨온더분’과 손잡고 ‘유니페어 컬렉션’을 내놨다.

리테일러와 협업해 자체 개발한 첫 라인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의 발 모양과 그에 맞는 최적의 소재와 디자인을 적용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경영이 취미생활은 아니죠.” 안정적 수익구조를 만들었는지 물어 본 데 대한 강 대표의 답이다.

‘가치’가 인정받는 날을 기다리며

강재영 대표는 “우리 패션시장, 소비자가 진정한 ‘가치’에 호응하는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일을 할 수 있는 한 패션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유니페어’가 운명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유니페어’가 전하고 싶은 문화와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찾아 전개하면서, 브랜드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마저 명품이 아닌데 비싸다거나 사용기간이 짧다는 등 이유로 팔리지 않고 사라지는 현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공급자로서의 자기반성도 덧붙인다.

“종종 우리 사회가 진짜 가치를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브랜드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걸 바꾸지 않고 싶은데…. 싼 가격, 유명 브랜드를 쫓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치를 인식하는 수준이 높아졌으면 하는 거죠. 시장이 양극화되니 공급자들도 하나라도 더 팔리는 것만 찾고 정당하지 않은 방식도 불사하게 되지 않나, 돌아봤으면 합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대여가 아닌 공유서비스에요"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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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더런웨이(Rent The Runway), 지난 3월 투자자들이 평가한 기업가치 10억 달러” “창업한 지 7년 된 패션 스타트업 르 토트(Le Tote)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인 로드앤테일러 인수” 올해 글로벌 패션시장에서 이슈가 됐던 패션 스타트업의 기사 내용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패션 의류 및 잡화를 대여해주는 미국의 대표 서비스다.

이처럼 미국은 대여 시장이 10년 넘게 지속돼 왔고, 급격히 성장했다. 일본과 유럽에서도 대여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사실 국내 시장에도 5년 전부터 시작해 글로벌 대여 서비스들을 표방한 수많은 서비스들이 나왔다. 개척자로 평가되던 ‘원투웨어’, SK플랫닛이 선보인 ‘프로젝트 앤’ 등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부터 패션 스타트업까지 10여 개가 넘는 서비스들이 있었다.

하지만 작년 기준으로 대부분의 서비스들이 문을 닫았거나 운영하더라도 별다른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 대기업이 전개했던 ‘프로젝트 앤’이 서비스를 종료한 작년 5월 직후부터는 국내 시장에 대여 서비스는 성장성이 없다고 평가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난 9월 44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혜성처럼 나타난 대여 서비스가 있다. 바로 클로젯쉐어다.

신규 서비스는 아니다. 대여 서비스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2016년 9월에 시작된 서비스다. 현재 국내 대여 시장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비스일 뿐만 아니라 총 50억 원대의 투자유치, 싱가포르와 홍콩 진출, 매년 10배가 넘는 성장률 등 외부에서 보기에도 훌륭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대여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해 온 클로제쉐어. 다른 서비스와 차이나는 특별한 것이 있는지, 클로젯쉐어 성주희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여 서비스의 구조를 바꾸다

이름에서 보다시피 클로젯쉐어는 다른 대여 서비스와 달리 대여보다는 쉐어(공유)를 강조한다. 보통 상품을 빌리기만 하는 회원으로 운영되지만, 클로젯쉐어에는 렌터(Renter, 빌리는 사람)와 쉐어러(Sharer, 공유하는 사람) 두 가지 유형의 회원으로 구성된다. 고객이 대여하는 역할과 동시에 직접 상품을 공급하는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성주희 대표는 “2016년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 우리도 다른 서비스와 같이 대여에 집중하는 서비스였다. 명품 가방을 대여해주는 서비스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됐다. 잘되면 잘 될수록 더 많은 상품들이 필요했고, 고객들의 상품요청도 계속 늘어났다. 결국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공급도 늘려야 하는 구조인데, 자본력이 약한 스타트업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클로젯쉐어는 서비스 오픈 6개월 만에 비즈니스 모델을 대여에서 쉐어링 모델로 전환했다. 고객들의 옷장에 잠자고 있는 상품을 활용해 플랫폼은 부담 없이 상품의 다양성을 높이고, 소비자는 사용하지 않는 자신의 물건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고객입장에서 공유하는 방식도 간단하다. 고객이 쉐어러를 신청하면 클로젯쉐어에서 쉐어봉투와 함께 픽업까지 직접 진행한다. 자신이 공유하고 싶은 상품들을 쉐어 봉투에 넣어서 보내주면 클로젯쉐어는 상품의 상태와 상품성, 트렌드 등 자체적인 기준으로 검수해 허가된 상품에 한해 대여 상품으로 분류된다.

대여상품으로 등록하게 되면 최소 3개월은 유지해야 하며, 그 이후로는 고객이 원하면 언제든지 가져갈 수도, 대여상품으로 유지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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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표는 “패션 아이템 대여 서비스는 트렌드와 스타일에 맞게 다양한 상품 공급이 필수인 영역이다. 이에 상품 매입을 위한 비용이 너무 커 수익을 내는데 아주 힘든 비즈니스다.

미국의 10년 이상 된 서비스들이 수익구조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국내의 많은 기업들이 서비스를 중단한 이유도 모두 같은 이유”라며 “대기업이 2년 만에 서비스를 중단한 마당에 스타트업인 우리가 같은 구조로 비즈니스를 이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미션이 상품 공급에 있어 최대한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었고, 우리는 여자들의 옷장에서 답을 찾았다.

옷장에 수많은 옷과 아이템이 넘쳐나도 입을 게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여자들, 계절이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면 어김없이 또 쇼핑을 하는 특성이 우리의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회원가입을 하면 누구나 쉐어러가 될 수도 렌터가 될 수 도 있다. 상품을 대여하기 위해선 이용금액을 지불해야하지만 자신의 상품을 공유하는 것은 무료다. 쉐어러 기능을 추가한 이후 사용자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현재 누적 회원가입 수는 6만 명, 쉐어러로 활동하는 고객은 2천여 명에 달한다.

마케팅 비용을 거의 지출하지 않았는데도 고객의 입소문을 통해 홍보됐다. 활성 유저(3개월 이상 쉐어러로 활동한 유저)들은 평균 10명 이상의 고객들을 추천해 유입시키고 있다.

현재 약 2만 개의 상품을 운영 중이며 쉐어러 상품이 80%, 입점 브랜드 상품이 20%이다. 물론 매입 상품이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초창기 서비스를 전개할 때 매입했던 상품들이라 큰 비중이 없다.

쉐어러는 자신의 상품이 대여될 경우 수익의 40%를 정산 받는다. 대여 수익은 정해진 알고리즘을 통해 일별 요금이 측정되고 총 대여일 수만큼 계산된다. 쉐어러 중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고객은 월 200만 원 이상 수익을 내며, 현재까지 2000만 원이 넘는 누적 수익을 얻은 고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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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와 기술을 기반으로 한 쉐어링 서비스

클로젯쉐어의 가장 큰 장점은 고객이 불편함 없이 자신의 물건을 공유할 수도 원하는 물건을 대여할 수도 있는 시스템이다.

일단 모든 상품들은 성수동에 위치한 클로젯쉐어 물류창고에서 직접 관리된다. 상품 촬영부터 수선, 관리, 세탁, 배송 등 모든 서비스를 직접 진행한다.

성 대표는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결국 이 모든 서비스를 직접 하려면 인력과 많은 자원이 투입돼야 했는데, 규모가 커지면 감당할 수 없는 구조라는 걸 깨달았다. 최대한 자동화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프로그램 개발이 필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지난해 3월 카카오 벤처스를 통해 총액 6억 원의 첫 기관 투자를 유치했다. 성 대표는 투자금으로 1년 동안 데이터사이언티스트, 비주얼 개발자, 세탁 전문가, 물류 전문가 등 전문 인력을 영입하는데 활용했다. 특히 고객들의 모든 활동을 데이터화 하고 분석하는데 집중했다.

“우리는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한다. 현재 많이 찾는 브랜드와 상품은 무엇인지, 배너 구성과 기획전은 어떻게 할지, 회원제 운영 등 모든 부분에서 데이터 기반으로 결정한다. 물류창고는 스마트팩토리를 추구한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연구개발한다. 쉐어링 파트(고객들이 쉐어하는 상품들 관리 파트), 세탁파트, 물류파트 등 각각의 프로세스에서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든다”라고 말했다.

특히 쉐어링 파트에서 상품 촬영과 상품 등록 등 상품을 게시하기 전까지의 영역에서 시간 낭비가 많았다. 이미지를 찍고 보정하고 상품의 상세정보를 입력하고 등록까지 수천 개의 상품들을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던 것이다.

때문에 자체적으로 비주얼 분석 솔루션을 개발해 사진 촬영과 동시에 보정이 되고 사이즈, 색상, 핏, 소재 등 상품의 상세정보가 자동으로 분석되도록 했다.

“종전 하나의 상품을 등록하기 위해 30분이 걸렸다면, 솔루션을 사용하면 5분 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하루에 100개의 상품을 등록할 수 있는 인력이 있다면 같은 인력으로 600개 이상을 등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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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옷장을 나의 리얼한 옷장처럼

“클로젯쉐어 이용자라면 아시아 어느 국가로 여행 또는 출장을 가더라도 더 이상 거대한 캐리어 없이 떠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싱가포르를 가면 싱가포르 쉐어러들의 상품을 대여하고, 일본을 가면 일본 쉐어러들의 상품을 이용해 굳이 모든 의류와 아이템들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말이다” 클로젯쉐어의 최종 목표를 설명하는 성 대표의 말이다.

클로젯쉐어는 1년 전 싱가포르에 해외 지사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해외 진출을 준비했다. 베타서비스를 오픈하고, 마케팅활동으로 현지 고객 데이터를 모았다.

물류창고는 국내에서 개발한 스마트팩토리 운영방식을 그대로 도입해 싱가포르 현지에 설립했다. 올해 말 정식 서비스를 오픈할 예정이며, 동시에 현지 SNS를 활용한 마케팅도 공격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성 대표는 “국내와 다르게 해외에서는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이 필요하다. 국내에는 선두 업체가 없었을 뿐 더러 경쟁 서비스들이 별로 없었지만 해외에는 우리보다 인지도와 자본이 뒷받침되는 글로벌 서비스들이 많기 때문이다.

쉐어방식의 대여 서비스를 전개하는 회사는 클로젯쉐어가 유일했는데 최근 글로벌 유사 서비스에서 공유 형태의 서비스를 테스트하고 있다고 들었다. 국내에서 쌓은 노하우와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해외 비즈니스는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해 빠르게 선점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클로젯쉐어는 홍콩에 두 번째 해외 지사도 설립했다. 대표적인 패션 도시로 손꼽히는 만큼 글로벌 서비스로 도약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클로젯 쉐어를 통해 아시아의 모든 옷장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밀집된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의 옷장이 리얼하게 자신의 옷장처럼 사용되도록 아시아 대도시를 중심으로 10개국까지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차세대 벼룩시장 꿈꾸며 사람과 물품 연결"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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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근처에서 만나는 시장. 당근마켓의 어원이다. 요즘 당근마켓 광고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실제 사업도 빠르게 확장 중이다. 당근마켓은 지역 주민들과 신뢰를 보장시켜 주며 쉽고, 빠른 지역기반 중고 직거래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지역 중고거래 뿐만 아니라 P2P, O2O서비스 연결, 좁은 생활권 지역검색 등 다른 형태로 발생하는 모든 거래를 실행할 수 있는 플랫폼을 꿈꾸며 지난 2015년 김재현, 김용현 공동 대표가 설립했다.

두 사람을 비롯한 35명의 직원이 네이버와 카카오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같은 분야에서 일해 온 직장 동료들이 지역 로컬 활성화라는 꿈을 안고 똘똘 뭉쳐 매일 쓰는 서비스를 만들자라는 취지로 일군 회사다.

현재 누적 다운로드 수 800만, 월간 방문자 수(MAU) 300만 명이 이용하는 서비스로 성장했다. 현재 구글 플레이스토어 쇼핑 부문에서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근마켓에서 월간 거래되는 개인 간 물품 거래액 규모는 500억 원에 달하고 있다. 1년으로 치면 6천억 원 규모다.

사업 초기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비전펀드로부터 15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카카오벤처스와 스트롱벤처스가 공동으로 총 57억 원을 이 곳에 투자했다.

얼마 전 알토스벤처스와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의 굿워터캐피탈을 통해 총 400억 원을 투자 유치하면서 누적 금액만 480억 원에 육박했다.

로컬 시대, 로컬 비즈니스에 대한 투자사들의 관심이 적지 않아 보이는 대목이다. 때문에 이 달 초 김재현 당근마켓 공동 대표이사를 만나 당근마켓의 상황을 물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질문 한 마디에 10분 간 장황한 답변을 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수가 적어 부연 설명을 이끌어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키가 크고 날씬한 체구를 가진 김 대표는 후자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당근마켓은 흔한 온라인 커머스 중개 플랫폼은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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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 마켓은 커머스 플랫폼이 아닌가

당근마켓은 지역 생활 플랫폼이다. 그래서 커머스가 아닌 동네 기반의 물품과 사람을 연결하는 플랫폼 지향적 모델을 짰고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다.

네이버와 카카오 근무 시절 직원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내 장터 게시판에서 서로 팔고 구매하는 것을 보면서 동네 기반으로 넓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사업이다. 가장 처음 동네 연결은 판교 지역에서 시작했다.

당시 플랫폼 이름도 ‘판교 마켓’이었다. 하나의 지역만 제대로 연결해보자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전국 단위로 확장해 현재 4천개 정도로 지역으로 나눠 운영 중이다.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물건을 주고받는 편리성을 모바일에서 제공하지만 직접 거래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구조다.

아직은 중고 물품 거래가 많지만 궁극적으로 사람 중심의 노동과 지식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금 더 쉽게 빗대면 지역 정보지 성격의 ‘교차로’나 ‘벼룩시장’을 디지털 환경에 맞게 선보인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개인과 개인은 물론, 개인과 지역 소상공인까지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하는 것이 사업 목적이기 때문에 사용자의 세심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파악해 데이터화하고 분석하는데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주로 어떤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가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당근마켓 사업이 시작된 지 4년이 흘렀지만 중고 물품 중심이라는것이다.

중고물품 거래 게시글 기준으로 볼 때 여성과 유아동(도서포함)의류와 용품의 거래 비중이 가장 높다. 두 개의 카테고리만 각각 18%를 차지하고 있고 잡화와 디지털가전과 생활가구, 미용과 남성 잡화 순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근마켓이 중고거래 중개 플랫폼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마 현대인들의 소비 패턴이 오랜 경기 불황과 인식 변화로 예전과 판이하게 다르다. 가성비를 따져가며 현명하게 소비하는 경향이 커졌다.

때문에 중고물품 거래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당근마켓이 성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당근마켓은 모바일로 10초 만에 물건 등록을 하고 채팅을 통해 거래 하면 된다. 가입비나 수수료는 없다.

특히 지역주민들과 직거래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함으로 사용자들 간의 신뢰를 주기 위한 매너 지표를 설정해 유저 신뢰도 평가에 주력하고 있다. 신뢰도 평가는 매너온도, 매너평가, 느낌신고, 거래후기를 통해 진행되며 당근마켓만의 차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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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 직거래 중개 플랫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질문에 부정할 수 없다. 당근마켓의 첫 번째 버전이 물품이라서 그렇다. 두 번째 확장 영역은 사람이다. 그리고 지역 소상공인의 광고 서비스다.

만약 우리 동네에서 식빵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당근마켓에서 관련 게시글을 올려 식빵 만들기 클래스를 열고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가능하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타인의 반려견까지 산책을 시켜 줄 수 있는 노동 시장을 연결할 수도 있다. 또 지식을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과 개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른 활동이 동네 기반에서 연결될 수 있도록 영역을 확대중이다.

과거 사람들이 직접 만나 이뤘던 관계와 거래를 모바일 통해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는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사람들이 직접 만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상거래를 이룰 수 있는데 그 기반이 동네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로컬(동네로 표현 하고 있음) 생태계가 많이 무너지고 있다. 지역사회 활동을 공유하고 경험해 지역에 뿌린내린 소상공인들의 비즈니스 생태계를 살리겠다는 큰 의미도 있다.

이미 당근마켓에서 활성화된 소상공인 지역 광고도 마찬가지다. 동네 슈퍼마켓, 세탁소, 빵집, 꽃집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이 적은 비용을 들여 광고형태의 게시글을 올리고 동네 사람을 상대로 홍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로컬 비즈니스라는 취지를 잇기 위해 전국 단위의 광고는 노출이 불가능 하도록 했다. 이제 규모의 경제에서 가치의 경제로 우리의 시선을 옮길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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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전략이 있나

서울 서초구·강남구·송파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제주도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 제공하는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를 내년 1분기까지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에선 병원·학원·피트니스센터 추천, 돌보미 요청 등 지역 내 정보가 문답 형식으로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다. 지역 기반 커뮤니티 서비스 확대와 함께 기존 전단지 광고 외에는 정보 전달 수단이 없는 지역 중소기업·소상공인이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까지 기능을 확장할 생각이다. 도입한 머신러닝(기계학습) 기술을 활용해 사용자 마다 개인화된 정보를 제공하는 영역도 확대중이다.

국내서 선보인 사업 모델로 해외 시장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베트남 지역을 검토 대상 국가로 놓고 현재 다각도로 점검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당근마켓이 중고거래와 광고 플랫폼으로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기술 고도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물리적 거리가 별다른 변수로 작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역의 중요성을 잊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지역과 맞닿아 있는 연결 관계로부터 깊은 우리의 삶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당근마켓의 향후 선보일 서비스로 알리고 싶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m

"귀엽고 사랑스러운것 싫어하는 사람있나요 아크메드라비가 잘되는 이유죠"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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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업계에게 ‘제 2의 젠틀몬스터’라 불리며 고공행진 하는 브랜드가 있다. 이제 막 3년차에 접어든 스트리트 캐주얼 아크메드라비(acme de la vie)다.

올해 1월 롯데 명동 면세점에 입점해 처음 면세사업을 시작했다. 첫 달부터 매출이 심상치 않았다. 3월 롯데 명동 면세점에서만 30억 원대 매출을 기록, 1분기 4개 면세점 매장에서만 100억 원을 넘겼다.

면세업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국내 면세점들의 러브콜을 받았고, 8월까지 국내에만 면세점 10개 매장을 오픈했다. 특히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성지로 여겨지는 인천공항 면세점에 입점하면서 3년도 안된 국내 토종 브랜드로는 첫 사례가 됐다. 2017년 7월에 론칭해 이제 막 2년 2개월 된 아크메드라비.

첫해 4억 원, 작년 47억 원, 올해는 7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되며 15배가 넘는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모두가 경기침체를 탓하며 장사가 안 된다고 하는 이 어려운 때에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쌍둥이 형제가 이끌고 있는 아크메드라비의 구재모 대표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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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페이스 티셔츠>

인생의 정점을 위한 도전

브랜드 이름을 처음 보고 영어도 아닌 것이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렵다고 느껴졌다. 인터뷰 전 ‘아크메드라비’ 단어를 찾아보니 프랑스어로 ‘내 인생의 정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브랜드 이름으로 선택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쌍둥이 형제는 그 말에 너무 꽂혔었던 건지 어렵다는 생각은 못했다(웃음). 그냥 이 말이 너무 좋았고, 다른 이름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2007년부터 구재모, 구진모 대표(이하 구 대표)는 10년 넘게 명품 도소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직접 물건을 소싱해 국내 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하던 구 대표는 온라인 시대가 열리면서 구매대행 및 명품 커머스 플랫폼 등이 생겨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해 재고만 쌓여갔다.

“유럽 현지에서 물건을 떼 와서 2배수 이상의 소비자가를 측정해 판매했었다. 하지만 온라인 시장이 커지면서 1.5배에서 많게는 1.3배까지 낮춰 판매하는 온라인 업자들이 생겨났고, 우리 오프라인 매장에는 손님이 끊겼다. 불과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은행장과 상담하던 VVIP였는데 빚이 쌓이다 보니 창구직원에게 상담 받는 신세가 됐다.

빚이 10억이 넘어가고,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창고에 넋 놓고 앉아 있었다.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아직 우리의 정점은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크메드라비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됐다”

당시 갖고 있던 현금 400만 원으로 반팔 티셔츠 150장, 반바지 80장을 제작해 오프라인 매장 명품들 사이에 비치했고, 이것이 아크메드라비의 시작이었다.


무신사 브랜드가 아닌 아크메드라비

당시 국내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이들의 필수 유통은 무신사였다. 실제로 거의 모든 스트리트 브랜드들이 론칭할 때 필수 유통채널로 무신사를 선택하고 있다. 매출의 절반 이상이 무신사를 통해 나오고 있는 브랜드도 수두룩하다.

이에 무신사는 지난해 매출 4500억 원, 올해는 1조 2000억 원을 바라볼 정도로 잘나간다. 하지만 아크메드라비는 오히려 외부채널 운영에 소극적이다. 초창기 무신사, 더블유컨셉 등 외부채널에는 아예 입점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채널별로 품목당 20~30장 한정 수량만 배분하고 품절이 되도 더 이상 입고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히려 플랫폼 MD들이 배너 광고와 기획전을 진행해주겠다며 상품을 더 입고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사실 우리도 많은 고민을 했다. 인지도가 없는 브랜드에겐 트래픽이 높은 무신사 입점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신사 브랜드가 아닌 아크메드라비가 되고 싶었다. 매출이 수십억 수백억이 나와도 무신사를 통해서 80~90%를 판매하면 무슨 소용인가? 평생 무신사를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무신사에 소속된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조금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우리 매장을 통해 판매하고, 자사몰을 통해 판매하면서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고 싶었다. 현재 온라인 매출에서 자사몰과 외부채널 매출 비율은 7대3 수준이다. 앞으로도 자사몰 판매비중을 70% 이상으로 유지할 계획이다.”

2017년 7월 첫 달 매출 400만 원, 8월 1900만 원, 9월 2900만 원, 10월부터 12월까지 3달간 4억 원. 그리고 2018년 연매출은 48억 원. 동기간 대비 10배가 넘는 매출 신장률을 보이며 구대표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연예인들이 즐겨 입는 베이비페이스 티셔츠

사실 아크메드라비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스타들이 즐겨 입던 베이비페이스 프린팅 티셔츠 때문이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기 얼굴에 독특하고 귀여운 표정, 아이돌 스타가 한번만 입고 카메라에 찍히더라도 소비자들에게 눈도장은 확실히 찍었던 것이다. 특히 워너원, 세븐틴, 아이콘 등 핫한 아이돌 중심으로 지금까지 2천 번 이상 협찬 됐을 정도라고 한다.

“10년 넘게 명품 도소매업을 하면서 스타일리스트나 헤어, 메이크업 종사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거의 대부분 어시(보조) 수준이었는데, 우리가 아크메드라비 론칭할 당시에 보니 어엿한 메인 실장이 되어 있더라(웃음). 이렇게 우정과 의리로 협찬을 진행할 수 있었고, 어시일 때 사줬던 밥값들이 지금의 아크메드라비를 만든 것이다.

&lt;아크메드라비 청담 쇼룸 전경 / Photo 황현상 기자&gt;

<아크메드라비 청담 쇼룸 전경 / Photo 황현상 기자>

무조건 스타에게 협찬을 하고 미디어에 노출이 되기만 하면 모든 브랜드가 다 잘될까?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국내에 글로벌 브랜드가 수십 개는 배출됐을 것이다. 확실한 브랜드 콘셉트와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하고 협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입어본 스타들이 품질에 만족해서 또 다시 찾게 된다는 게 아크메드라비의 강점이다.

“명품을 오랫동안 다루다 보니 쉽게 망가지지 않고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이 좋은 옷이라는 가치관이 있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티셔츠이지만 좋은 원단에 고퀄리티 프린팅으로 작업했다. 이러한 점이 아크메드라비만의 차별화가 된 것 같다. 모든 원단과 생산공정은 국내에서만 진행하며 우리(쌍둥이 대표)가 직접 QC(Quality Control) 작업을 한다.”

무엇보다 불량률을 줄이고 고품질의 상품을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반응생산을 통해 불필요한 재고를 줄이는 것이라고 한다.

구대표는 “이틀에 한번 리오더를 진행하고 매일 6,000장씩 생산하고 있다. 처음에는 공장 사장님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판매될 옷들만 생산한다는 생각에 꼼꼼히 생산 해주시고, 오히려 매일 공장을 가동할 수 있어서 더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중화권을 매료시킨 아크메드라비

확실히 중국의 영향이 컸다. 한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아이돌 스타의 스타일이 매번 이슈가 됐고,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SNS의 힘입어 중화권 젊은 소비자들에게 노출이 많이 됐다. 또 청담동이 중국 관광객들에게 필수 관광코스로 여겨지면서 자연스레 아크메드라비 청담쇼룸은 중국 관광객들로 붐비게 됐다. 청담동에 매장이 있는 핫한 브랜드로 인지된 것이다.

“처음에 브랜드를 만들 때 중국시장을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다. 아이돌 협찬을 했던 것은 단지 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진행했던 건데 이렇게 빨리 인지도가 생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10평 남짓 되는 청담 쇼룸에서 월 매출 2억 원에서 3억 원이 나온다. 거의 중국 관광객 매출이며 최근에는 일본을 비롯해 대만, 말레이시아 관광객들도 많이 늘었다. 이제는 청담동 쇼룸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면서 청담동 필수 관광코스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진출도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4일(현지 시간) 중국 기업 대련본드스트리트과 3년 200억 원 홀세일 계약을 체결, 앞으로 3년간 중국 대련지역에서 아크메드라비를 독점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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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는 보이런던코리아를 중국에 성공적으로 전개한 업체로 유명하다. 자체적으로 보유한 유통채널과 마케팅 노하우로 아크메드라비를 중국시장에 안정적으로 안착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는 10월 1일까지 쇼룸 1개와 쇼핑몰 내 4개의 매장을 오픈한다.

“중국의 시장은 너무나 방대해서 지역별로 환경이나 문화 및 트렌드가 확연히 다르다. 하나의 파트너와 중국 독점 전개권을 계약하기보다 지역별로 강점을 지닌 업체들과 각각 파트너십을 체결해 전개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지난달 중국에 존재하는 아크메드라비에 대한 모든 상표권을 인수했고, 이제 공격적으로 중국 사업을 전개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대련지역을 시작으로 인지도를 쌓고 다른 주요 지역에도 현지 벤더사를 통해 오프라인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언제든 입을 수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옷

아크메드라비는 스트리트 브랜드다. 하지만 여타 브랜드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스트리트 브랜드라 하면 반항적인 이미지와 멋지고 쿨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그에 반해 아크메드라비는 베이비페이스 프린팅을 아주 크게 박은 티셔츠가 메인 아이템이다. 실사 이미지를 사용해 표정도 다양하고 리얼하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것이 아크메드라비가 추구하는 브랜드 철학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옷, 입으면 입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까지 웃음을 짓게 되는 브랜드다.

“남자, 여자 상관없이 누구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카카오 프렌즈, 라인 프렌즈 등 전 세계적으로 캐릭터 사업이 잘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멋있는 옷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옷으로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다양한 카테고리의 브랜드와 협업해 의류 외에 다른 품목에서도 아크메드라비만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콘셉트를 입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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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면세점 아크메드라비 매장 전경 / Photo 아크메드라비>

아크메드라비는 론칭 시작부터 비현실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지금까지도 성장세는 멈출 줄 모른다. 지난해 매출 47억 원, 올해는 상반기 매출만 278억 원. 하반기에는 면세점 추가 오픈과 중국 사업까지 합세해 올해 700억 원은 거뜬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직원도 작년 7명에서 현재 본사 직원만 21명, 매장 직원까지 하면 60명이 넘는다.

“너무 빠르게 성장한 탓에 회사 운영에서도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넥스트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많긴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면서 즐기고 있다. 그 방법이 지금의 아크메드라비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우리의 정점을 만들어낼 것을 믿기 때문이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