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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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 시몬스는 산업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갤러리 같은 곳에 납품하는 가구를 디자인하다가 디자이너 월터 반 바이렌동크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인턴을 하게 된다. 거기서 1991년 파리 패션위크를 구경하면서(처음으로 본 패션쇼가 마르지엘라의 1991년 컬렉션 화이트쇼라는 이야기가 있다) 패션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후 1995년 자기 브랜드를 론칭하고 디올과 캘빈 클라인을 거치게 된다.

예전에는 패션 브랜드는 패션 디자이너가 이끌어 가는 게 기본이었다. 고급 소재로 만든 슈트나 드레스 같은 옷은 만드는 데 특히나 손이 많이 가는 복잡한 제품이고 그런 걸 만드는 데에는 장인의 전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드샵이나 아틀리에에서 일할 직원들을 뽑았고 브랜드의 수장은 은퇴하면서 후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런 가내 수공업 방식의 전통은 많은 브랜드들이 대형 기업의 일부가 되면서 일차적으로 사라진다. 사실 그렇게 편입되지 않더라도 시장이 이미 너무나 커졌다. 회사는 정교하게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노쇠해진 이미지를 바꾸고 세상에 임팩트를 주는 방식 중 하나로 브랜드를 이끄는 디렉터를 바꾸었다. 굵직한 패션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패션 뉴스가 되고 있다.

이제는 패션 디자이너가 굳이 디렉터를 맡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유럽이나 미국, 일본을 넘어 소비자들이 보다 다양해 진 이유가 있다. 하지만 최근 결정적으로 가속화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스트리트 웨어가 하이패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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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고급 옷’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예전과 다르다. 뉴스에는 보수적인 금융 회사의 복장 자유화 뉴스를 다루면서 포멀 웨어가 과연 지속될까 하는 소식이 나온다. 웰 메이드, 핸드 크래프트, 전통 제작 방식 같은 용어는 이제 하이패션보다 일본의 셀비지 청바지 브랜드나 30, 40년대 워크웨어를 다시 만드는 브랜드의 홍보 문구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크게 늘어난 하이 패션의 협업 프로젝트들은 이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방식을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실험들도 있다.

2017년 스페인 브랜드 데시구알은 사진 작가이자 아티스트인 장 폴 구드를 아티스틱 디렉터로 기용하는 시도를 했다. 또 헬무트 랑은 잡지처럼 편집장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다. 데이즈드의 이사벨라 벌리에 이어 V 매거진의 알릭스 브라운이 브랜드의 에디터 인 레지던스를 맡으면서 브랜드의 흐름에 따라 한 두 시즌을 함께 할 협업 디자이너과 함께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뉴스는 역시 루이 비통 남성복의 버질 아블로다. 버질 아블로는 미국 출신이고, 흑인 남성이고, 건축 학도 출신으로 패션을 전공하지 않았다. 즉 지금까지 주로 주요 하이 패션 브랜드를 이끌어 오던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버질 아블로의 ‘루이비통’ 행은 위에서 이야기한 라프 시몬스와 비교하면 조금 재미있다. 물론 톰 포드나 마크 제이콥스처럼 미국 출신 디자이너들이 유럽 브랜드를 맡아 성공한 사례들이 이미 있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의 흐름은 이전과는 약간 다른데, 패션 바깥에서 왔고 보다 스트리트나 서브 컬쳐 친화적이다.

결국 미국의 전통적인 브랜드는 유럽에서 디렉터를 데려왔고, 프랑스의 전통적인 브랜드는 미국에서 데려오는 약간 이상한 모습이 등장했다. 특히 이 두 브랜드가 기반하고 있는 나라는 기존 아이덴티티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변화의 방식으로 자신의 문화에 대해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한 사람을 데려온 건 바로 그게 필요한 이유가 생긴 거다.

브랜드가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은 물론 중요하다. 버버리든 구찌든 모습이 크게 변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아카이브에서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는 건 컬렉션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걸 다루는 방식은 달라지고 있다.

즉 패션 말고 음악이나 예술 혹은 서퍼나 스케이트 보더, 클라이머 등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기반으로 기존 패션인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옷에 접근하고 그를 통해 만들어 낸 새로운 패션이 신선함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또한 세상의 수많은 다양성을 패션으로 포섭해 다루고 소화해 내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접근은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패션을 공부해 온 사람들이 지나치게 패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듯, 패션 바깥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이 입고 보고 온 옷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가 있는 경우가 많다.

시즌이 몇 번 지나면서 너무 동어 반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느껴지는 브랜드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바로 그런 한계를 보여준다. 아무튼 지금은 오랫동안 쌓여 온 기존 패션의 틀을 다시 한 번 탈바꿈해야 할 시기라는 건 분명하다.

그 변화 속에서 버질 아블로는 루이 비통 남성복을 이끌고 있고, 리한나는 LVMH와 하이패션 브랜드 론칭을 논의하고 있고, 힙합 뮤지션 퍼렐 윌리엄스는 샤넬과 협업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이런 변화는 바로 세상의 흐름에서 오는 거기도 하다. 이런 흐름에 발을 맞추고 있는 지금의 여러 실험과 시도를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 거라 기대한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