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패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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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하순 ‘샤넬’과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이하 CD)를 역임한 전설적 패션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타계했다. 그는 20세기 중반 고급 맞춤복 전성기부터 SPA브랜드의 시대를 ‘직접’ 겪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는 자신이 지휘한 패션하우스와 본인 이름을 딴 브랜드는 물론 다양한 협업, 파트너십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동시에 색연필과 스케치북 위에 그린 드로잉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패션을 구현하는 전통적 CD였다. 많은 이가 ‘패션의 한 시대(an era of fashion)가 저물었다’며 그를 추모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세상을 바라보면, 현재 패션 하우스의 CD들은 과거와 무척 달라졌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전통적인 패션 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어시스턴트 생활과 정규직 디자이너를 거쳐서 패션 하우스 수장이 되는 경우는 지금도 물론 많다. 하지만 사람들이 열광하고 지지하는 패션계 CD들의 면면을 보면, 무언가 끊임없이 창조하며 새로운 장르를 넘나드는 도전을 즐긴다. 그중 일부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단어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인플루언서 시대’의 CD는 과거와 달라졌다.

밀레니얼 세대가 일으킨 균열

‘패션위크’라는 이름 아래 파리, 런던, 뉴욕과 밀라노 등에서 연 2회, 혹은 연 4회 컬렉션을 선보이고, 쇼룸 비즈니스를 통해 패션 브랜드를 전개하는 ‘시스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 그리고 모바일 문화의 등장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오프라인 매장에 방문하지 않고, 모바일 웹사이트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소비하며 변화는 더 강렬해졌다. 중국, 동남아시아 등 신흥시장의 밀레니얼 소비자들은 ‘지금 보고, 지금 산다(SEE NOW BUY NOW)’는 캐치프레이즈를 충직하게 실천한다.

‘루이비통 X 슈프림’ 신제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노숙과 웃돈 지불을 불사한다.

시대는 이렇게 바뀌었다. 2006년을 전후해 생긴 수많은 ‘거리패션 블로그’는 고급 기성복과 스트리트웨어, 스포츠웨어와 캐주얼웨어처럼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뉘어 있던 패션 지형을 무너뜨렸다. ‘스트리트웨어’는 이미 수십 년간 그 자리에 존재한 문화이자 산업이었지만, 반론의 여지없이 ‘요즘 애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슈프림’ 모자에 ‘지방시’ 스웨트셔츠를 입고, ‘나이키’의 한정판 스니커즈를 신은 사람이 고급패션과 스트리트웨어의 경계를 허문 것이다. ‘하이엔드 스트리트웨어’란 키워드도 동시대 패션 그자체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멍’을 만든 뎀나 바살리아, ‘헬무트 랭’을 되살린 ‘후드 바이 에어’의 셰인 올리버, 한정판 스니커즈 붐을 이끈 카니예 웨스트와 ‘아디다스’가 손잡은 ‘이지’, 그리고 버질 아블로의 ‘오프화이트’가 모두 2010년을 전후해 부상했다.

물론 그들의 컬렉션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고 하나의 단어로 묶기 어렵다. 하지만 기성 패션계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며 지지층을 모았다는 교집합이 있다.

그들은 ‘기성’ 패션 CD처럼 수십 년간 업계에 종사하지 않았다. 대신 탁월한 브랜딩 역량과 독특한 개성,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심미안으로 고급 기성복 업계와 스트리트 패션, 그리고 예술과 대중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접수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브랜드’가 된다 - 버질 아블로

현재 패션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디렉터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버질 아블로를 꼽을 것이다. 그는 ‘루이비통’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인 동시에 자신의 브랜드 ‘오프화이트’를 이끈다. 하지만 고급 기성복 업계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버질 아블로를 패션 디자이너로 바라보지 않는다. 2019년의 그는 패션과 예술, 디자인과 건축,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를 아우르는 하나의 ‘현상(phenomenon)’이다. 훌륭한 디자인의 결과물로서 의상과 장신구를 내놓는 패션 디자이너가 과거 시장의 엘리트 군을 형성했다면, 버질 아블로는 일종의 변종이자 변칙이며, 혁신이다.

그를 향한 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로고’를 전면에 내세우는 뻔한 힙스터라는 혹평과 활자화(typeset)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부여하고 설득한다는 호평을 동시에 받는다. ‘오프화이트’와 ‘나이키’의 ‘더 텐’ 프로젝트, 가장 최근 ‘리모와’ 협업과 ‘루이비통’ 남성복까지. 문자로 먼저 제시한 낯선 요소들을 섞은 다음, 공감각적인 작업으로 재구축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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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의 디자인은 타이포그래피, 즉 직선적인 서체와 인용으로 제품 특징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이것은 요즘 패션의 과시적 경향과 맞물려 재미를 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두 아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재치’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에게 디자인 과정이란 궁극적으로 ‘자신이 본 무언가처럼 보이는 공간을 찾는 것’이다.

버질 아블로는 기성 제품, 즉 무수히 생산하는 ‘공산품’과 프랑스의 개념주의 미술가이자 ‘다다이즘’ 운동을 이끈 마르셀 뒤샹의 작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 둘의 조합은 기성 패션이 지닌 것과 다른 신선함과 관점을 제공한다. 버질 아블로에게 ‘제품’은 그저 제품일 뿐이다. 다만, 그가 재해석하는 과거 유산들은 모두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상품을 하나의 오브제로 두고, 그 안에 관용, 개방성, 투명성을 더한다. 버질 아블로는 이러한 디자인 작업 방식에 관해 ‘나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버질 아블로가 만든 옷과 장신구는 고유한 ‘버질 아블로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 위에 남은 서명처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패션을 도구로 쓴다. 컨버스의 척 테일러 스니커즈부터 루이 비통의 고급 기성복까지, 버질 아블로와 다른 디자이너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방식’ 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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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러시아 청년들의 우상이 되다 - 고샤 루브친스키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가 만든 컬렉션이 런던 도버 스트리트마켓(Dover Street Market)을 시작으로 파리 런웨이에 올랐을 때, ‘뉴 룩(new look)’에 목마른 세계 패션계는 한순간에 사로 잡혔다. 2018년까지 자신의 이름을 건 ‘고샤 루브친스키’ 브랜드로 1년에 두 차례씩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 역시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로 부르기는 어렵다. 고샤 루브친스키는 자신의 경력을 도시 소년들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로 출발했고, 다수의 전시에 참여해 사진집을 발매하며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한다.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린 지금도 그는 꾸준히 친구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고, 사진집을 내며, 동네 친구들과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러시아 청년들이 ‘창조’한 스트리트웨어의 또 다른 특징은 기성 패션계가 생각한 스타일의 규칙을 허물어버렸다는 점이다.

이 역시 러시아라는 독특한 환경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정치와 사회적으로 중국 못잖게 폐쇄적인 러시아는 세계 정치 및 지정학, 경제 관점에서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고샤 루브친스키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언제나 모스크바를 정말 좋아했지만, 모스크바 ‘중심지’에 있는 것들은 아니었어요. 오직 ‘변두리’를 좋아했죠. 저와 친구들이 자랐던 곳들처럼요.”


스트리트웨어 시장의 방향제시 - 새뮤얼 로스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둔 패션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인 새뮤얼 로스(Samuel Ross)가 만든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어콜드월(A-COLD-WALL)’은 과포화 상태에 도달한 스트리트 웨어 시장이 어디로 향하는지 길을 제시한다. 사회적 계급과 갈등, 주변 일상 풍경이 현대 영국의 그림자이자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한 어콜드워는 2015년 데뷔 이래, 소위 ‘워킹 클래스 히어로 working class hero’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노동자 계급의 정서와 감각을 신중하고 복합적인 디자인으로 담아낸 이 런던 스트리트웨어는 독특한 위치를 선점함과 동시에 (모순적이지만) 세계 온갖 고급 편집매장의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스니커즈 문화와 로고에 열광하는 동시대 청년뿐만 아니라 리치 더 키드(Rich the Kid) 같은 미국 힙합의 떠오르는 스타가 그들의 충실한 고객이자 친구이며, 지지자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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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그렇듯이, 새뮤얼 로스가 협업하는 범주 역시 다채롭다.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는 한국 래퍼 ‘딘DEAN’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고, 유서 깊은 전문 아웃도어 브랜드 오클리(Oakley)는 새뮤얼 로스와 함께 캡슐 컬렉션을 만들었다.

과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자신의 역할을 ‘패션 브랜드’에 한정했지만, 새뮤얼 로스에게 패션은 하나의 텅 빈 캔버스와 비슷해 보인다. ‘어콜드워’는 명백하게 패션 브랜드의 모습을 띠면서도, ‘새뮤얼 로스’ 개인의 작업 범주는 그보다 훨씬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아이콘에서 하이 패션의 중심으로 - 매튜 윌리엄스

웹 매거진 ‘하이스노비어티(Highsnobie ty)’ 인터뷰 기사에서 매튜 윌리엄스는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옷을 만든다고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거대 명품 기업 LVMH가 주관하는 시상식 최종 6인에 든 2016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 알릭스 스튜디오(ALYX Studio)를 만들고 디올맨(DiorMan)의 장신구 디자인에 모티브를 제공하기 전부터, 이미 버질 아블로 그리고 카니예 웨스트와 함께 프로젝트 브랜드를 만들고 밀레니얼 세대에게 패션을 전파한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은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

매튜 윌리엄스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사진가 ‘닉나이트(Nick Night)’나 ‘노부요시 아라키(Nobuyoshi Araki)’, 팝 슈퍼스타 ‘레이디 가가(Lady Gaga)’와 함께 일했다.

시대를 이끄는 음악을 만들고, 기성세대와 다른 이야기를 담아낸 패션 잡지를 펴내는 친구들 또한 세계 곳곳에 포진해 있다. 브랜드로서 알릭스 스튜디오는 패션을 사회와 분리하여 그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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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윌리엄스는 공공연하게 인종 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반대한다고 밝혔으며, 그러한 요소를 녹인 티셔츠를 기습 출시하기도 했다.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온갖 이미지와 심상, 거리 예술과 오래된 도시 문화, 컬렉션을 만들며 오가는 이탈리아 도시들과 미국 동·서부의 분위기가 뒤섞여 있다.

알릭스스튜디오 컬렉션은 스트리트웨어가 걸어온 ‘모방과 창조’의 연장선에 있지만, 실제로 모방하여 선보이기에는 이미 정체성이 뚜렷하다. 그래서일까? 버질 아블로의 뒤를 잇는 하이엔드 스트리트 웨어의 대표주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난 3월 하순 막을 내린 서울패션위크 기간 중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영국의 패션 컨설턴트 룰루 케네디를 만났다.

그는 영국에서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를 발굴하는 패션 이스트 앤 맨(Fashion East & MAN)의 설립자이자 디렉터, 러브(LOVE) 매거진의 대기자, 자신의 패션 브랜드 ‘룰루앤코(Lulu & Co clothing)’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년째 ‘패션 이스트’를 이끌며 런던의 젊고 재능 넘치는 디자이너들의 대모가 됐다. 끊임없이 젊은 디자이너들을 후원하고 그들이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패션계의 새로운 CD들에 관하여 글을 쓰면서, 그와 나눈 대화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패션 이스트에서 담아낸 것은 단순히 ‘하나의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그 브랜드들이 각자 해석한 ‘런던’이라는 도시, 또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실제로 패션 이스트에 선정되어 컬렉션을 선보인 디자이너들의 작업은 모두 그들 각자의 ‘런던’이자 ‘라이프스타일’로 보였다.

지금 시대의 패션 브랜드가 자기 색과 개성을 유지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제 ‘패션 유행’만을 따르기에는 부족해졌다. 룰루 케네디의 답변에서 나는 ‘포스트 패션 CD’ 시대의 미래를 보았다. 그는 우리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정작 생각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중요하게 여겼다. 새로움을 부르짖지만 모든 게 인터넷 안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시대일수록 자신의 색을 따르고,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시즌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을 믿고,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패션 브랜드를 전개하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하다. 패션 이스트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지금 이게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유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의 런던’ 스냅 샷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비전과 창의성을 보여준다면 그것을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제공한다. 그들의 작업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알린다. 그래서 더 실험적이고, 모든 쇼가 완벽하거나 성공적이지는 않다. 그래도 괜찮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