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프랭땅 백화점> 유럽 백화점이 공간혁신을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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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백화점 업계가 공간혁신을 위한 적극적인 리노베이션에 나섰다. 경기침체와 온라인 쇼핑 확대 등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경험요소와 테마형 전문관 도입을 확대하는 등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유럽의 백화점도 최근 오프라인 리테일 업계에 불어 닥친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패션 도시인 뉴욕을 비롯해 런던에서도 굵직한 리테일러들이 문을 닫았고, 국내사정 역시 몇 곳의 백화점이 폐점됐거나 앞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백화점은 소비자가 전자상거래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변화된 라이프스타일 취향과 경험 마케팅에 초점을 맞추는 대대적인 공간변화가 필요했다. 

최근에 유럽 백화점이 리뉴얼을 강행하는 이유도 바로 공간혁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간혁신으로 새로운 쇼핑환경을 꾀한 리테일러들 중 한 곳이 파리 프랭땅(Printemps Haus smann) 백화점이다.

프랭땅은 1865년에 설립이후 엘리베이터와 전기 조명 그리고 지하철 연결을 시도했던 최초의 백화점이기도 하다. 몇 차례 화재로 위태로운 시기도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리뉴얼하고 건물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75년에 프랑스 정부는 프랭땅 건물을 역사적인 기념물로 등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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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땅은 아르누보 건축양식으로 독특한 큐폴라(돔)와 매력적인 외관만큼 쇼윈도 연출도 독창성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건물자체가 문화재인 프랭땅 백화점, 그 중에서도 옥상 테라스는 탁 트인 공간에서 파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꼭 둘러보라고 강력 추천하는 곳이다. 

프랭땅 백화점은 이렇게 다양한 매력과 특색을 갖추었지만 빠르게 변하는 소비 트렌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남성관과 뷰티, 리빙관을 전면 리뉴얼했고, 여성관은 일부 리뉴얼 중으로 3개의 건물 모두 공간 혁신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플랫폼을 시도한 럭셔리 온라인 채널 

프랭땅 백화점은 바로 옆에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이 위치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구도이다. 라파예트와 프랭땅은 시즌마다 독창적인 쇼윈도 연출로 소비자에게 감동을 준다. 2020년 2월의 프랭땅 백화점 쇼윈도 연출은 시즌연출이 아닌 프랭땅의 새로운 럭셔리 온라인 채널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알렸다. 

쇼윈도에 연출된 내용은 럭셔리 패션 전용 전자상거래 공간과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혁신적인 온라인 판매 사이트인 ‘Printemps.com’을 소개하고 있다. 프랭땅은 디지털 혁신을 위해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브랜드를 독점적인, 잡지 형식의 콘텐츠로 디지털에 배치하고 다양한 무료 문화예술의 공유공간으로서 온라인 고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Printemps.com은 쇼윈도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사이니지를 통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온라인 채널을 오프라인에서 흥미롭게 전달했다. 

디지털 사이니즈에서는 인스타그램에서 캐스팅한 다양한 연령, 성별, 신체를 가진 참가자들을 차별 없이 보여주며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소개하고, 의상과 얼굴을 쇼윈도에 복사하듯 연출해 지나가는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전세계 코로나19로 오프라인 공간에 거리를 두는 요즘, Printemps.com은 다양한 고객층에게 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트렌드를 전달하는 채널로 자리를 잡아가며 장차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남성관 7층에 식품관을 오픈한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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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리뉴얼을 마친 남성관(Printemps de l’ Homme)은 브랜드 경험중심 공간과 매력적인 비주얼 머천다이징으로 고객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남성패션과 특색 있는 매장들을 층별 둘러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공간을 발견한다. 식품관이 남성관에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식품관이 7층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식품관은 대체적으로 지하층에 배치된 사례가 많다. 국내에서도 백화점의 자존심이자 얼굴인 1층을 명품 브랜드나 뷰티 공간으로 고급스러운 백화점 이미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최근 소비패턴의 변화를 반영해 식품매장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유통채널이 증가하고 있다. 식품관을 통째로 1층으로 올려놓은 백화점이 있는가 하면 식음료(F&B)매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증가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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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땅 식품관>

프랭땅의 식품관(Printemps du Goût)은 고층에 꾸민 최초의 백화점 사례이다. 특히 식품관팀은 프랑스 전역을 다니면서 장인들을 만나 셰프, 100% 프랑스에서 생산, 제조된 식재료를 식품관에 집결시켰다. 이러한 식재료로 완성된 식품관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 풍경을 조망하며 미식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7층 식재료관에서는 프랑스 요리를 해보고 싶을 만큼 고급스러운 다양한 식재료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의 대표 와인과 샴페인은 빠질 수 없는 쇼핑 품목이며 디저트인 초콜릿과 마카롱, 과자류와 주방용품까지 주방의 모든 재료들을 원스톱 쇼핑으로 즐길 수 있다. 식품관의 특별한 공간인 서점코너는 요리책과 샴페인, 빈티지 와인, 유기농 와인과 맥주를 포함한 1.500여 권의 참고문헌을 비롯해 전문 요리관련 서적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다.

왜 프랭땅은 식품관을 지하도 아니고 1층도 아닌 7층에 올렸을까? 몇 년 전만해도 프랭땅의 식품관은 2층이었는데 건물 자체를 남성관으로 리뉴얼하면서 전망이 가장 좋은 위치에 식품관을 올린 것이다. 

소비자는 식재료를 쇼핑하면서 파리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자연채광까지 누릴 수 있는 이 같은 식품관을 오래토록 바라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식품관을 7층에 꾸며 배치한 프랭땅의 사례는 프랑스는 물론 해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함을 준다. 더욱이 도시풍경을 바라보며 차나 식사를 즐긴다면 한층 차별화된 고객의 경험공간과 장소가 될 것이다.

 

파리지앵 아파트 콘셉트의 메종은 무엇을 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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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땅 메종관​>

집은 개인의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외부로 연결되는 공간이다. 소비자는 집에 대한 공간인식의 변화로 생활 전반에 자신의 취향을 담은 특별한 일상을 꿈꾼다. 이러한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니즈는 백화점 리빙관의 다양한 혁신적 변화를 선보이게 한다. 프랭땅 메종관(Printemps de la Maison)도 대대적인 리뉴얼을 시도했는데 그 첫 단계가 남성관을 이동한 그 건물에 뷰티와 메종 그리고 아동관을 배치해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3층에 걸쳐 200개가 넘는 브랜드를 모은 뷰티관은 체험을 중시하는 공간전개로 뷰티를 위한 모든 서비스를 한곳에 집결시켰다. 명품 브랜드만의 고급스러움과 각 브랜드만의 창의적 공간들은 아름다운 피부를 위한 경험 장소로 충분했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한 메종관은 더욱 창의적이다. 파리지앵 아파트 콘셉트로 설계된 메종관은 사용자 친화적인 거실, 주방, 침실 3가지 테마로 구성돼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출과 체험공간으로 소비자를 유도한다.

리뉴얼은 실내 디자이너 ‘사라 라보(Sarah lavoine)’에게 맡겨 그녀의 생활 예술 코드를 공간에 담았다. 매장은 오크 헤링본으로 바닥을 마감하고 곳곳에 설계된 아치형 몰딩 구조물 그리고 긴 창문 설계로 자연채광을 강조한 방식은 아파트의 건축양식과 생활양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실처럼 구성된 2층은 아파트 복도와 비슷한 중앙 통로를 따라 배치한 긴 테이블에 생활용품을 감각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전개는 바로 긴 창문이다. 메종의 공간은 자연채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소비자로 하여금 밝고 따뜻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3층의 주방공간은 긴 창문에서 전해져 오는 자연광이 주방 용품들을 조명보다 빛나게 했으며 브랜드마다 독창적인 공간을 꾸며 소비자를 한참동안 머무르게 한다. 또한 4층은 린넨의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침구용품들을 마주하며 침구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이곳 공간 역시 자연채광으로 편안하고 스위트한 홈 분위기를 충분히 살려냈다. 

프랭땅 메종에서 가장 눈에 띈 비주얼 머천다이징은 동선에 긴 테이블 전개다. 이러한 동선 전개방식은 파리 유명 백화점과 런던 백화점에서 동일하게 확인된다. 보통 고객 동선은 시야 확보나 고객 편의로 집기 배치를 지양한다. 하지만 이러한 획기적인 연출성은 획일적인 백화점 환경에서 벗어나 고객에게 오프라인 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볼거리와 제품구성을 보여주기 위한 프랭땅 메종의 적극적인 시도이다. 

 

새로운 소비공간은 고객경험을 유도한다

장식예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업용 건물 중 하나인 프랭땅은 지속적인 리뉴얼로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쇼핑 경험을 제공해왔다. 리뉴얼을 대부분 마친 프랭땅의 공간을 보면 국내와 조금 다르다. 국내는 휴식 공간 및 경험공간을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고객이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 공간 전략을 시도한다면 유럽은 공간의 다양한 측면을 노출한다.

예를 들어 고객의 삶의 여정을 반영한 친화적인 공간이 그러하다. 백화점의 획일적 공간전개에서 벗어나 스트리트 마켓거리를 연상케 하는 독창성과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공간과 제품을 경험하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전략이 돋보인다.

프랭땅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가상공간인 온라인 채널을 통해 모든 연령과 신체 유형에 따른 모델을 세워 포용성과 다양성 및 환경, 책임성에 중점을 두는 등 프랭땅만의 차별화로 럭셔리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했다. 온라인 디지털 혁신에 이어 고객이 오프라인 스토어를 방문했을 때 독창적인 공간, 감성적인 체험, 미식여행 등 다양한 ‘경험과 인상’을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엿보인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현대미술을 아는 만큼 패션 트렌드가 보인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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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울티모’ 디자이너 김동순

 

<월간멋> 기자 시절, 패션디자이너가 유명 화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의 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화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미술관장을 지내던 권옥연 화백(1923~2011), 디자이너는 미술대학 출신의 ‘울티모’ 김동순 실장이었다. 

김동순 실장과 강남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했는데, 검은색 지프 레니게이드를 운전하고 왔다. 시골길을 다녀오기엔 안성맞춤이었지만 패션디자이너가 자가용으로 지프를 직접 운전하는 경우를 처음 봐서 그때의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고가는 길이 제법 멀기도 했고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라 길을 잘못 들기도 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는 운전도 말투도 매우 씩씩했다. 단발머리에, 귀걸이나 목걸이 등의 치장을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1983년, 38세에 서울 압구정동에서 ‘울티모’로 데뷔한 김동순 디자이너는 동년배에 비해 출발이 10년쯤 늦다. 이화여대 조소과를 졸업하던 해(69년)에 동아방송 PD였던 송관률씨와 결혼한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75년에 남편이 이른바 ‘동아사태(동아일보사가 정부의 탄압을 버티지 못하고 부당함에 맞서던 기자들을 대규모로 해고한 사건)’로 강제 해직을 당하자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어느 날 남편의 선배 PD가 “패션디자인을 배우면 큰 패션회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봐주겠다”면서 국제복장학원을 소개해준 것이다. 속성반을 권유받았지만 ‘이왕 공부할거면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에 어린 두 자녀를 친정에 맡기고 1년 과정 정규반에 입학해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중 명동에서 우연히 권옥연 화백을 만났다. 권 화백은 김동순의 이화여대 재학 당시 회화과 교수였고, 스승과 제자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권 화백은 김동순에게 “패션디자인 공부? 잘 선택했다. 내 아내도 패션디자인을 하지 않느냐. 열심히 공부해라. 미적 감각도 뛰어나니 반드시 성공할 거다”라면서 격려해주었다. 권 화백의 부인은 극단 자유의 대표이자 무대의상 디자이너였던 이병복씨(1927~2017)다.

“어느 날 학원에 갔더니 분위기가 부산했다. 동료들이 ‘중앙디자인콘테스트’를 앞두고 준비하느라 난리였다. 나는 그때 코트를 만들고 있던 터라 그 옷을 완성해 출품했는데 입상했다. 콘테스트 사회를 보던 아나운서가 내 옷이 마음에 든다면서 자기에게 팔 수 없겠느냐고 물었는데, 판매용으로 만든 것도 아니어서 그냥 선물로 주었다.”  

&lt;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왼쪽)와 김동순 디자이너가 그린 해당 의상 일러스트(오른쪽).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 패션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가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우아하고 강렬한 컬렉션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gt;

<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왼쪽)와 김동순 디자이너가 그린 해당 의상 일러스트(오른쪽).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 패션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가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우아하고 강렬한 컬렉션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옷을 받은 아나운서는 김동순을 명동의 어느 매장에 추천해 줬고 면접을 보게 됐다. 일주일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낮 12시까지는 매장에서 판매도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아직 대여섯 살밖에 안된 아이가 둘인 ‘엄마’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는데, 다른 곳들도 조건은 비슷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한 대학 동기가 같은 대학 불문과 출신 친구인 M의 회사에 가보라고 권했다. M의 남편은 성도물산 최형로 사장이었다. 미국에 OEM으로 수출하던 성도물산이 내수시장 개척을 위해 새로운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최 사장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김동순이 입고 있던 면 티셔츠와 개더스커트를 보고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원단을 사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자, 최사장은 “우리가 그런 옷을 만들려고 한다”면서 옆 건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OEM 수출을 하던 곳이라) 엄청난 기계와 원단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고, 최 사장은 김동순에게 “여기에 있는 원단들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렇게 김동순은 1978년, 성도물산의 브랜드 ‘톰보이’ 디자이너로 패션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성도물산이 야심차게 개발한 ‘톰보이’는 브랜드 이름부터 색달랐고, 당시 여자 기성복은 상하의 한 벌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던 때여서 단품 위주의 ‘톰보이’는 출범과 동시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정장의 개념에서 벗어나 니트나 면, 코듀로이 소재 재킷, 데님, 티셔츠 등 지금은 패션의 기본이 되어버린 코디네이션 개념을 ‘톰보이’가 도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캐주얼 브랜드’가 등장하게 된 때, 김동순은 그 중심에 있던 ‘톰보이’ 디자인의 주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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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

남편의 강제 해직, 패션디자이너로 새 삶 시작

“78년 7월 ‘톰보이’ 오픈을 앞두고 면접을 봤는데, 언제부터 출근하겠냐고 해서 8월 1일부터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최 사장이 출근하기 전이지만 디스플레이용으로 옷 몇 점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일주일동안 여러 스타일을 만들어 매장에 전시했다.” 

그런데 그 ‘디스플레이용 옷’들의 인기가 폭발해 오픈 당일 매출 목표를 6배 정도 초과 달성했다. 출근하기 전부터 이른바 ‘대박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이어 ‘리니아(Line이라는 뜻)’라는 브랜드도 론칭했는데, 벨로아 소재를 주로 사용한 ‘리니아’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대박을 친 알짜 브랜드였다.

‘톰보이’에서 성과를 높이자 81년 교복자율화 바람을 타고 월급의 몇 배를 더 주겠다면서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어느 대기업은 기존 급여의 10배 이상을 주겠다, 토요일 오후 2시간만 근무해도 된다는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친구 남편의 회사에 다니면서 돈 때문에 이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나중에 대학에서 강사라도 하고픈 마음에 모교 대학원 복식디자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부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추가학점을 요구받고 특정 교수 과목의 점수까지 박하게 나오면서 대학원을 그만 뒀다. 대학원을 포기했더니 회사도 다닐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히니, ‘리니아’를 운영해보라며 스튜디오 차리는 비용까지 지원해줘서 1~2년 정도 운영하다가 1983년에 독립, 압구정동에 ‘울티모’를 열었다.  

‘울티모(Ultimo)’는 ‘가장 최근(the latest)’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남성명사다. 처음엔 남성복 브랜드로 시작했다가 6개월쯤 뒤부터 여성복으로 전환했는데, 같은 뜻의 여성명사인 ‘울티마(Ultima)’보다 어감이 더 마음에 들어서 그냥 쓰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 부군 송관률씨는 패션기업 경영인으로 탈바꿈해 아내가 한평생 디자인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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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를 알려면 현대미술 이해는 필수”

‘톰보이’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동안 김동순은 일종의 보너스 형식으로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출국 자체가 무척 까다롭던 시절이었기에 당시의 경험은 디자이너로서 안목을 넓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88년 여행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는 날개를 단 듯 했다. 인도만 10번 이상 다녀왔고, 네팔도 자주 가서 거의 가이드 수준일 정도. 스리랑카와 터키, 동유럽의 조지아나 우크라이나 등 일반인들이 자주 가지 않는 곳들도 일찍부터 많이 다녔다. 1989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관했다. 

김동순 선생은 “패션 디자이너에게 미술, 특히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강조한다. 90년대 초반 건국대와 이화여대에서 겸임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가장 강조했던 점도 “현대미술을 모르면 트렌드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크리스토 자바체프다운’ 또는 ‘안젤름 키퍼적인’이라고 할 때, 크리스토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독일 국회의사당 전체를 천으로 감싸고 파리의 명물 퐁 네프 다리도 천으로 감싼 미술가이고 안젤름 키퍼는 화가이자 조각가라는 특징은 물론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나 색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1년 1월, 김동순 디자이너는 당시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올해의 디자이너상’ 90년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신우, 진태옥, 앙드레김, 설윤형 등 이전에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받은 상을 데뷔한 지 7년 만에 받은 것이다. 그가 데뷔 10년도 안되어 정상급 디자이너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게 된다.  

첫째는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 입상한 이후 77년부터 매년 패션쇼에 참가하고, 이후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SFAA) 초창기 멤버로 최초의 서울컬렉션에 참가하는 등 신작 발표 무대를 끊임없이 가졌다는 것이다. 1990년에는 오사카컬렉션, 93년엔 도쿄컬렉션 등 일본 무대에서도 ‘디자이너 김동순’을 알렸다.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패션 선진국들은 매년 일정하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컬렉션 제도가 일찍부터 정착돼 있었다. 컬렉션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신작’을 발표하는 디자이너가 극히 드물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는 77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작을 발표해왔다. 

&lt;2006년 1월 24일 중국 광서TV가 설날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던‘울티모’컬렉션 패션쇼(오른쪽). 해당 시즌 컬렉션은 국내에서도 대 히트를 쳤다. photo 울티모 제공​&gt;

<2006년 1월 24일 중국 광서TV가 설날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던‘울티모’컬렉션 패션쇼(오른쪽). 해당 시즌 컬렉션은 국내에서도 대 히트를 쳤다. photo 울티모 제공​>

인체를 입체적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전공(조소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통미와 현대미술적 감각의 조화는 ‘김동순 디자인’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해마다 새롭게 해석하여 새 작품을 내놓는다. 

프랑스의 패션평론가 지아니 사메는 컬렉션 출품작을 평가할 때 “신인 디자이너들은 무엇이 새로운지를 중점적으로 보고, 기성 디자이너들은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본다”고 했는데, 김동순은 매 시즌 ‘이번엔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호기심을 갖게 만든 디자이너였다. 그의 80년대 90년대 의상들조차 최근의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각적으로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둘째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출발을 맞춤의상(양장점)이 아니라 기성복(톰보이)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크게 인정받아본 경험을 한 것은 김동순 디자이너 연배에서는 유일한 케이스였다.

특정 고객의 비위를 맞춰본 적이 없는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상대방이 동료나 선후배이건, 기자이건, 정부나 지자체 담당자이건 자신의 소신을 가감 없이 밝힌다. 상도의에 벗어나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또한 김동순 디자이너의 특징 중 하나다. 

&lt;잡지협찬&gt;

<잡지협찬>

김동순 디자이너는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서울 도곡동 울티모 본사 5층의 작업실은 원단 샘플, 세계 각국의 기념물들에 더해 각종 자료와 책들이 사방의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의 책 사랑은, 아버지 직장(대한중석) 때문에 강원도 영월에서 살던 10대 소녀 시절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서울 갔다 오면서 사다준 금박으로 장식된 책, <렌의 애가>(모윤숙)를 지금도 갖고 있을 정도. 나이 70이 되었을 때 가장 받고 싶은 선물로 ‘세계문학전집’을 원해서 1백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에, 사상전집 1백 권까지 2백 권을 선물 받았을 정도다. 

책 사랑 못지않게 눈에 띄는 취미는 스크랩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번 보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스크랩해둔다. 역사 관련 기록들이 많고, 인상적인 사진들(조각, 건축, 자연 등)도 스크랩해둔 게 많다. 보고 싶은 책들 관련 스크랩은 따로 두고 있는데, 여백마다 그 책에 대한 생각들이 손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다채로운 내용의 스크랩북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는 나에게 “미국 연방대법원청사에 공자 입상이 세워져 있는 걸 아느냐?”고 묻는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연방대법원 동편 입구에 모세 좌상을 중심으로 모세 왼쪽에 솔론 입상, 오른쪽에 공자 입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개신교가 중시하는 예수를 빼고 이 3인조 석상을 세운 이유에 대해 중앙일보가 2020년 1월8일자로 보도한 내용을 스크랩한 것이다.   

그가 “놀랍지 않느냐?”고 묻는다. 놀랍다. 그런 사실 자체도 놀랍고, 그런 사실에 관심을 갖고 놀라워하는 김동순 디자이너의 끝없는 관심사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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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길이 최적의 길이었다

김동순은 국제복장학원도,‘톰보이’라는 브랜드도, 중앙디자인콘테스트라는 행사도 알지 못했다. 지인에 의해 혹은 우연히 알게 되어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취직하고, 콘테스트에 입상했다. 

그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인데, 평생의 업으로 삼아 37년째 그 길을 가고 있다. 거짓 꾸밈을 싫어하고, 고정된 것보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패션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도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접촉하고 수용해온 삶. 쿠바 여행을 갔다가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읽고, ‘자신의 이상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다는 김동순. 그의 작업실 한쪽 벽엔 체 게바라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다. 

책과 미술, 여행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여전히 왕성하다는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패션디자이너는 ‘입어서 편하고, 입는 사람이 좋아하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차츰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한때 40개까지 매장을 운영했지만 IMF 이후 줄여나가 지금은 전국 백화점에 17개 매장을 내고 있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정리하면서 여행 다니고, 책 실컷 보는 것은 늘리는 삶, 그것이 김동순 선생이 지금 꿈꾸고 있는 삶이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지속가능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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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인드풀컴퍼니 서영지 대표, 오버랩 박정실 실장 

 

패션에서 지속가능은 이제 화두를 넘어 일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 누가 담당해야하는지, 수익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하는지 잘 아는 기업이 있을까?

현재 국내 패션 기업의 지속가능 실현 방법이라면 누가 만든지 조차 모를 친환경 소재를 사용해 예쁘지도 않은 제품을 만든다. 마케팅 수단이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일회성이다. 문제다. 

지속가능의 중심에 있는 패션 업계는 수년째 지속가능성 실현을 외치고 있다. 중요함은 알지만 소비자가 선택할만한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서 지속가능을 실현하기 위해 기획 단계부터 재고 원단을 쓰고, 다시 만들어 활용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국내 패션 업계를 향해 지속가능을 외치고 나선 두 사람이 있다.

마인드풀컴퍼니 서영지 대표와 오버랩 박정실 실장이다. 두 사람은 모두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출신이다. 서 대표는 남성복 시리즈 상품기획 팀장, 박 실장은 업사이클 브랜드 래코드 디자이너였다. 

근무 시점이 달라 서로 알지 못했지만 지속가능에 대한 관심이 같아, 서 대표가 사업 방향을 구상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다. 이들이 최근 지속가능이라는 하나의 ‘아젠다’를 가지고, 이를 실현해 보겠다며 의기투합했다.

 

팔릴 만한 제품이어야 한다

둘의 만남은 일종의 협업이다.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만나 패션 기업들이 실현하기 어려운 지속가능 패션을 대행해 주겠다는 기획안을 들고 나섰다.

서영지 대표는 “여러 패션 기업에서의 (실무)경험으로 상품기획 프로세스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현업에 있는 MD나 디자이너들이 지속가능 제품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죠. 그들이 직접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팔다 남은 재고를 활용해 다시 팔릴 만한 제품을 만드는 업사이클링을 제안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제안하는 업사이클링이란, 디자인이 가미되고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지속가능 제품은, 비싼 가격과 볼품없는 디자인, 업사이클 제품인 것처럼 티가 난다.

“재고 원단을 사용해 다시 제품을 만들 경우 2차 재고를 양산하는 방식으로 되어서는 안되요. 다시 만들더라도 상품성이 있고, 기업 입장에서도 수익적으로나 마케팅으로나 활용도가 있는 제품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패션 브랜드라면 누구나 재고가 있다. 3년 이상 넘는 악성 재고는 90% 할인을 해도 팔리지 않고 결국 소각되거나, 땡처리 둘 중 하나다.

버려지는 재고를 다시 신상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지속가능의 시작이 된다. 한 단계 나아가서는 판매로 이어지고, 다시 활용되는 자원의 순환이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원형의 순환구조다. 서영지 대표는 사업을 구상하던 중 지속가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초반에는 무작정 상품 기획 아웃소싱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국내 패션 업계는 아직 디자이너의 역할이 필요한 사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지속가능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면,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해야하는 데 외주 업체로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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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랩 박정실 실장(좌), 마인드풀컴퍼니 서영지 대표(우)>

박정실 실장은 지난 해 초 코오롱을 나와 자신의 브랜드 ‘오버랩’을 시작했다. 물론 지속가능 브랜드이다. 박 실장은 서영지 대표를 만나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두 사람은 지난 해 7월 지속가능 제품을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박정실 실장은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갔다가 수명이 다한 원단은 어떻게 처리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버린다고 하더라구요. 너무 좋은 원단인데 다시 쓰면 좋을 것 같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주시더라구요(웃음). 별도의 마케팅을 하지 않아 그리 반응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시도들이 계속 이뤄져야한다고 봐요.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지속가능이 더욱 구체화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속가능 실현 도와드립니다

서영지 대표는 “지속가능 상품기획 비즈니스를 제안하는 것이 조금 이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죠. 아직 지속가능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비용의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죠. 지속가능에 대한 시도가 실제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지 걱정하는 것에서 부터 가로막히기도 해요. 실무자들과 몇 번 상담을 진행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서영지 대표는 박정실 실장과 같은 실력 있는 지속가능 디자이너를 물색 중이다. 다양한 아이템의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시너지를 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함이다. 

“패션 기업들의 지속가능 실현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들의 남은 재고와 우리의 경험, 디자인력이 만나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박정실 실장은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다. 브랜드 디자이너와는 작업 방식도 다르고, 디자인적 사고의 시작부터 조금은 차이가 있다.

디자이너들은 머릿속에서 먼저 디자인을 구상하고 밑그림을 그리지만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들은 그럴 수 없다. 어떤 소재로, 활용해야할지 제품을 보고 판단해야하기 때문이다. 업사이클링 작업은 꽤 많은 공정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국내서 이를 소화해낼 수 있는 공장도 제한적인 상황이다.

 

양산도 가능하다

서영지 대표는 사업을 준비하면서 설문 조사도 진행했다. 업계 관계자와 지인들은 대상으로 지속가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지속가능 제품은 대부분 디자인 수준이 떨어지고, 비싸다는 의견이 많았다.

“프라이탁 등 지속가능 브랜드가 널리 알려지면서 20~30대 소비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더라구요. 아이를 키우는 밀레니얼 세대들은 이왕이면 의식 있는 소비를 추구하고, 가치소비 의지를 보였고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죠” 

대부분 지속가능 제품이라고 하면 맛배기, 보여주기식, 지나가는 마케팅 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량도 많이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의 실력은 조금 다르다.

어느 정도 양산이 용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적게는 100개 부터 많게는 500개 까지도 가능하다. 물론 지금은 가방과 같은 잡화 아이템에 한해서지만 규모가 커진다면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다품종 소량 시대인 만큼 백화점 브랜드들도 한 아이템을 500장 이상 만들지는 않는 상황에서 업사이클링 아이템을 500장 이상 만든다면 수익적으로도 괜찮은 수준이다.

우선은 재고를 활용한 잡화부터 시작해 의류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캐주얼이 약한 남성복 브랜드들이나 여성복 브랜드들도 좋은 원단으로 만든 제품이 시즌이 지났다고, 사이즈가 잘못됐다고 기획이 잘못된 제품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서영지 대표는 “정말 평소에 입을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 포인트에요. 파타고니아는 오히려 자신들의 브랜드 철학을 담아 더 비싸게 팔기도 하지만 우리는 적정 가격에, 디자인을 충분히 고려한 제품을 만들어 드릴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는 것을 티가 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조금 의아했지만 마케팅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기획단계 부터 재고 상품이나 소재를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이를 파는 행위만으로도 지속가능이 이뤄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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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지 대표와 박정실 실장이 버려진 천막소재를 활용한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업사이클링 제품 제안 받아 보기

업체 입장에서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들기란 의외로 쉽다. 미팅을 통해 브랜드 콘셉트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마케팅으로 활용할 것인지, 스팟 아이템으로 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한다. 아이템에 대한 밸런스를 조정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의견을 나눈다. 어떤 재고를 어떤 아이템으로 만들어낼지에 대한 것이다. 다음은 브랜드가 가진 재고를 공개한다. 기획자가 물류 창고를 찾아 필요한 제품을 선정하고 다시 디자인해 새 제품을 만들어 낸다. 끝.

제품을 만들지 않고 남은 재고 소재를 제공한다면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도 있다. 재고 원단이 없는 브랜드는 없기 때문이다. 남은 재고 원단으로는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 맨투맨, 티셔츠, 가방 등 캐주얼은 물론 창고 구석에 있다가 버려질 원단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업사이클링 제품을 의류나 가방 등 품목으로 제한하지 않고 소비자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고 갖고 싶은 라이프스타일 굿즈로도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박정실 실장은 “가장 속상한 것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이 단순히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어 버리는거에요. 내가 만든 제품이 잘 사용되어야하는데, 그런 목적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업체들에게 수익이 되고, 재고를 다시 사용되는 모델을 만들고자 한거에요. 브랜드는 소재를 갖고 있고, 우리는 기획력과 디자인력을 갖고 있으니 뜻만 맞으면 실현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죠”라고 했다.

지속가능 대행업체가 아직 국내에는 없다. 해외에서는 리폼 대행업체나 기업과 연계한 비즈니스 모델이 많지만 국내에는 아직 없다. 없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안 하기엔 실력이 아깝다. 

서영지 대표는 “최근 몇 군데 브랜드와 협의를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고 있어요. 한 소규모 브랜드는 여력이 안 되고, 한 브랜드는 이를 담당해야할 디렉터가 고민 중 인가봐요.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죠. 디자이너들이 지속가능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하죠. 지속가능을 설득해야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가장 답답한 부분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패션 기업들은 단순히 제품을 잘 만들고 잘 파는데 만 생각이 미치고 있다. 환경 생각은 뒷전이다. 어떤 기획자들은 업사이클링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업사이클링 공정은 단계가 두 배로 많다. 해체부터 세탁, 다시 건조해서, 디자인하고 원단을 재단해, 생산 공장에 보내 꿰맨다. 말처럼 단순하면 좋으련만 다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음이 확실하다. 서 대표와 박 실장은 브랜드의 니즈를 파악하는 상담부터 시작해 직접 샘플을 만들고 디자인해 제안한다. 일반 브랜드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

“아마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못하는 업체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좋은 소재로 만든 재고들이 창고에서 자고 있다면 깨워주고 싶네요.”

무조건적인 업사이클링은 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재고로 다시 제품을 만들어봐야 또 재고를 양산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것은 안 팔렸을 때 얘기고 팔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디자인도 좋고 심지어 제품이나 소재를 재활용했다면, 또 팔렸다면, 재고는 수익이 되고, 지속가능은 이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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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다 된 패러글라이딩 원단으로 만든 가방 >

재고로 재고를 만들지 않는다

소비자에게 매력있는 제품이어야 업사이클링도 의미가 있다.

박정실 실장은 “어차피 버릴 원단이면 다시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닌가요? 하하”

“계절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시즌 개념이 재고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죠. 사람들은 트렌드를 쫓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임에도 촌스러워 졌다며 치워버리고 새 제품을 사니까요. 좋은 가방을 계속 들 수 없도록 새 것을 매번 만들어내는 행위도 문제라고 봅니다.”

패션에 대한 딜레마는 해결책이 없다. 새제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패션 산업을 위축될 것이고 계속 만들어내자니 지구가 울고, 지속가능을 실현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뤄져갈지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과 노력이 패션 업계가 지속가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다면 절반 이상의 성공일 것이다. 

서영지 대표는 “패션 상품이 만들어지기 까지 많은 과정이 있지만 디자이너만 노력해서는 안 되죠. MD도 최대한 재고를 줄일 수 있도록 적절히 발주해야하고, 소재를 만드는 공장도 환경을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만들었어도 어쩔 수 없이 재고가 남겠지만 모두 맡은 분야에서 지속가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업계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더 좋고 예쁜 소재 개발해 국내 사업 키울 것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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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엘이이’로 돌아온 이지연 디자이너  

디자이너 컬렉션 ‘자렛’은 2009년 론칭 이후 곧바로 신생 브랜드답지 않은 시장성과 완성도로 호평을 얻었다. 젠더 경계를 허물고 남성복과 여성복의 매력을 모두 가진,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을 딱 적당하게 소화한 컬렉션은 글로벌 트렌드와도 잘 맞았다. 

이지연은 브랜드 론칭 2년 만에 정부, 지자체가 지원하는 신인 패션 디자이너 지원 사업의 대상자로 자주 이름을 올리는 디자이너가 됐다. 난생 처음 참가한 해외 트레이드 쇼에서 현장 수주를 받았고 홍콩, 파리, 뉴욕 등 참가하는 트레이드 쇼마다 꼬박꼬박 오더를 따내고 고정 거래선을 늘렸다.   

2015년 3월 열렸던 ‘서울패션위크 201 5 F/W’ 서울컬렉션 참가를 기점으로 그는 ‘성장가능성이 높은 신인’에서 ‘시장을 읽는 눈이 탁월한 실력파’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시가 패션쇼를 지원하는 제너레이션넥스트에 연속 3회 선정되고 난 후였다. 

그해 가을, 그리고 2016년 봄까지 이어 컨셉코리아(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디자이너 글로벌 마케팅 지원 프로그램)의 12, 13번째 시즌 주역이 됐다. 뉴욕패션위크 여성복 컬렉션 기간 데뷔 패션쇼도 가졌다. 국내 영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입소문이 크게 나서 유명 걸 그룹의 무대 의상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자렛’은 2017년 일정 규모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나서는 기업쇼로 서울컬렉션을 치렀다. 꽤 열성적인 투자사가 지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그 후 한동안 서울패션위크 공식 일정에 ‘자렛’이 올라오지 않았고, 연락도 닫질 않았다.  

2년의 공백, 그리고 새 브랜드 ‘엘엘이이’

이지연 디자이너는 작년 10월, 2년의 공백을 깨고 ‘엘엘이이(llee)’로 돌아왔다. 

‘서울패션위크 2020 S/S’을 통해 선보인 ‘엘엘이이’의 첫 시즌 컬렉션은 여성복을 메인으로  남성 컬렉션까지 선보였다. 사실 패션쇼를 보기 이전에는 왜 새로운 브랜드를 들고 나왔나, 똑 떨어지는 실루엣이 예뻤던 ‘자렛’의 연장선이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쇼피스 비중이 높은 컬렉션에 적잖이 놀랐다. 

이태원 주택가 골목에 낸 아담한 작업실 겸 사무실에서 만난 이지연 디자이너는 “사실 조금 더 준비해서 발표하고 싶었다”고 했다. 

“S/S 시즌에는 애슬레저 트렌드를 ‘엘엘이이’만의 감성으로 풀었다. 지금의 애슬레저 룩은 운동할 때만 입는 것이 아니니까 패션성이 있는, 제대로 된 애슬레져 룩을 제안하고 싶었다. 

‘엘엘이이’ 쇼에서는 더 완성도를 높인, 예술적 컬렉션을 보여주고 싶다. 무엇보다 원단을 개발하고 싶었는데, 다음 시즌부터는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좋은 캐시미어, 울 공급처도 확보했고 설치 미술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의 폭을 넓히면서 다양성을 가져가는 컬렉션으로 만들겠다. 커머셜한 스타일은 세컨 브랜드로 전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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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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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일, 재미삼아 하는 일, 남을 돕는 일, 나 자신을 위한 일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된다. 일 하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분류로 나뉜다. 그러나 지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려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과 찾지 못한 사람’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한 사람은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직장을 다닐테고,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에게는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이 찾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 까지 벌수 있다면 최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로 돈까지 벌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패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극히 생소한 일이었다.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주변에 패션 디자이너나 패션 기업인도 잘 없다.

아마 패션 업체에 다니는 사람을 지인으로 두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패션을 업(業)으로 삼고 옷을 만들어 돈을 버는 패션 사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이 아니었다.

물론 이 다음부터 소개하려는 분들이 ‘아무나’는 아니었다. 혹자는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 10%의 노력과 90%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었다.

좋아하다 일이 되다

덕업일치라는 말은 생소했다. ‘오타쿠’라는 일본어는 한 가지에 몰두해 대인관계도 없이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하는 은둔형 외톨이(히끼꼬모리)와 맥을 같이한다. 이를 다소 부정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던 지라 이에서 파생된 오덕, 덕후, 덕질 이라는 단어들도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 분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전문가가 된, 어쩌면 누구보다 그 분야를 잘 아는, 그런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뜻의 ‘덕업일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미디어에서는 ‘덕업일치 란 없다. 그냥 상황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궁금증에서 출발한 취재는 빠르게 진행됐다.

여러 채널을 통해 이 같은 사람을 수소문했고, 어렵게 패션 관련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고 있는 몇 명의 덕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이를 사업화하고, 플랫폼을 만들고 있으며,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임몬타나의 최영훈 대표, 와디의 신발장 유튜버 고영대,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 유니페어 강재영 대표 등 덕업일치를 이룬 덕후들을 만나봤다.

그들은 어떻게 덕업일치를 이뤄냈을까.


안경 수집 덕후, 안경을 만들다

‘프레임 몬타나’ 최영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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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8만 팔로워를 거느린 최영훈 대표(이하 몬타나최)는 패션과 관련 제품들을 수집하는 덕후였다. 옷을 좋아해서 코치넬리 등 이태리 유명 브랜드는 물론 안경, 시계, 나이키 운동화 등 출장을 다니며 여러 제품을 수집했고, 그 제품들을 보면서 공부했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에 2년 간 근무하다 회사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 MBA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경영컨설팅을 하다 케미칼 회사를 차렸다.

몬타나최는 안경을 좋아해 1920년 대 출시됐던 빈티지 안경테부터 여러 클래식 뿔테들을 수집했다. 수많은 레퍼런스를 모으고, 아름다움을 배우고, 느끼면서 미적 감각을 키웠다. 수집이 힘이 됐다. 좋아서 모으기는 했지만 안경을 만드는 데는 전혀 지식이 없었다.

케미칼 사업은 매출 규모는 커도 수익률이 그리 높지 않아, 큰돈을 만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새로운 사업을 고민하던 중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업의 시작이 되었다.

아이템을 고민하다 보니, 옷도 너무 잘 만드는 브랜드가 많아 자신이 없었고, 신발도, 액세서리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안경이 떠올랐다. 내가 쓰고 싶은 안경을 찾아봐도 클래식하고 빈티지한 전문 브랜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은 재고 문제도 있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경은 10년 넘게는 클래식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계속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도 많이 안 들고. 현실적으로 기존 브랜드들과 차별화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몬타나 최는 자신이 직접 안경을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한 후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는 연결 고리 하나 없이 일본 안경 생산의 메카인 후쿠이현 사바이 시에 메일을 보내 안경 제조 업체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몇 개 업체를 소개 받아 직접 방문했다. 프로토 타입 제작을 맡겨 가장 잘 만든 업체를 선정하고 제품 생산을 맡겼다.

그는 “운이 좋았다. 선택한 업체가 사기꾼이었다면 프레임몬타나는 지금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정직한 업체였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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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칭 당일 3억원 매출

이렇게 만들어진 안경 브랜드 ‘프레임몬타나’는 그 행보 자체가 놀라웠다. 론칭 당일,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3억원 어치 제품이 팔려나갔다. 30만 원 상당의 제품 1천 개가 24시간 동안 판매됐다.

프렌치 스타일 안경테 ‘크라운 판토’는 안경 윗부분이 각이 진 제품인데 현재 대부분의 안경 브랜드가 이를 따라한 제품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프레임몬타나’는 순식간에 유명 브랜드가 됐고, 60개 안경점에 입점했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프레임몬타나의 종이안경 서비스. 안경의 경우 써 보지 않고 구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종이로 안경 모형을 만들어 원하는 고객에게 보내주었다.

고객은 종이 안경을 자신의 얼굴에 대보고 원하는 제품을 골라 온라인에서 주문하는 방식이다. 종이 안경은 모두 고객에게 제공한다. 이는 순수하게 프레임몬타나 팀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서비스가 단번에 높은 매출을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몬타나최’의 안경 사랑은 비즈니스가 됐다.


프랑스도 인정한 토종 브랜드

몬타나최는 프레임몬타나의 준비 과정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두 공개했다. 어떻게 브랜드가 만들어지는지 공개하는 것은 다소 리스크도 있었지만 재미 있는 정보를 팔로워들에게 제공했다.

처음부터 팔로워들을 비즈니스 모델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채널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팔로워들은 점점 늘었고 그들에게 더 많은 정보들을 제공했다.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 결과 사진을 찍는 것조차 싫어했던 그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가 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SNS를 통해 비즈니스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두 달 전 프랑스 안경 전시회 ‘실모(SILMO)’에 참여해 전 세계 안경 전문가들로 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실제로 전시회에 참여하는 안경 브랜드들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작은 신규 브랜드가 빅이슈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프레임몬타나는 유럽 지역 5개 유명 안경 셀렉숍에 입점하게 됐다.

최영훈 대표는 “안경으로 유명하지도 않은 나라의 작은 브랜드가 이런 반응을 얻은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글로벌 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프레임몬타나는 유럽 에이전시를 두고 영업망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하우스 비즈니스에서 진짜 기업으로

프레임몬타나는 처음 12개 모델로 시작했다. 지금은 15개로 늘었다. 선글라스 1개를 포함하면 16개. 내년에는 17개로 늘리고 티타늄 모델도 3개를 추가한다. 스타일 수를 늘리고 하우스 브랜드의 느낌을 살려 고가로 전개한다.

이와는 별도로 세컨 브랜드를 론칭한다. 가격대를 합리적으로 책정해 좋은 안경을 더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물론, 돋보기 안경, 캐주얼 안경 등 약 200개 정도의 스타일을 구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 달 중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한다. 모인 자금으로 프레임몬타나주니어(가칭)을 론칭해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물론 온라인도 병행한다.

최근에는 킥스몬타나 브랜드 사업도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모아온 나이키 빈티지 스니커즈를 판매하고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제품들을 프레임몬타나와 함께 전시했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나이키 마니아들이 몬타나최를 찾아오고 있었다.


쉽지 않은 덕업일치

어려움도 있었다. 혹자는 먹고 살만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모으다가,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돈을 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물론 아이템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했지만 ‘잘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했다. ‘프레임몬타나’가 망했다면 자금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가 좋게 나와 다행이다. 덕업일치로 사업이 될지 전혀 몰랐다.

5년 전만해도 월급쟁이였다. 빨리 승진하고 사장이 되고 싶은 우리 세대의 가치만 쫓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삶이 180도 달라졌다. 성공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와 자신도 빨리 성공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도 좋아하는 일을 찾는 데 20년이 걸렸다.

너무 조바심내지 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재밌게 하다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다. 덕업일치는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덕업일치를 이루고 행복 지수가 높아졌다고 한다. 마지못해 밤을 새던 직장생활과 비교하면 지금은 밤을 새서 일하더라도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자신의 라이프가 훨씬 나아졌다며 웃음을 보였다.


신발 덕후, 스니커 마니아들의 장(場)을 만들다

‘와디의 신발장’ 유튜버 고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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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디, 휠라를 만나다 >

스니커즈 마니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 스니커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알려진 유튜버가 있다.

와디의 신발장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유튜버 고영대 씨(이후 와디)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이다. 내부 조직과 외부 조직을 연결하고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드는 일을 한다.

어려서 부터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금도 회사에서 판을 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그의 방송은 재미있고 신선했다.

신발 덕후가 만든 스니커즈 팬덤

와디가 자신의 본업 외에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것은 단지 신발을 좋아해서 이다. 자신이 관심있는 내용들을 영상에 담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발에 대한 영상만 조회수가 높게 나왔다. 이에 아이디어를 얻은 와디는 채널 이름을 ‘와디의 신발장’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신발 방송을 시작했다.

영상학을 전공해 영상 편집도 빠르다. 그의 영상에는 효과도, 텍스트도 없다. 영상만이 있을 뿐이다. 17분을 찍으면 15분 영상을 올린다. 숨소리만 편집해서 내보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운동화 밑창을 닳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는 ‘슈구’ 사용법부터 시작해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했다. 자신이 모은 신발은 300족, 새것은 100족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신발들을 리뷰를 하면서 스니커즈 마니아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아 지금 구독자수는 10만을 훌쩍 넘었다.

와디가 지금까지 올린 영상은 1천개가 넘는다.

그는 퇴근하고 아이들을 재운 10시가 넘으면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신발을 영상에 담아 올리는데 까지 1시간을 투자한다. 주말에도 가족과 함께 하고 남는 시간에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스니커즈 전문가로 유명해 지자 여러 비즈니스적인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디는 어렸을 적 부터 좋아했던 싱가포르의 나이키 외주 디자이너 사포타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만나 협업을 제안했다. 함께 옷을 만들고 이를 판매한 수익은 기부했다.

&lt;지난 11월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스니커 매니아들의 행사 ‘스니커하우스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단체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Photo 스택하우스&gt;

<지난 11월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스니커 매니아들의 행사 ‘스니커하우스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단체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Photo 스택하우스>

스니커즈 행사에 3천 8백명 몰려

현재 국내에는 이렇다할 스니커즈 행사가 없다고 한다. 해외에는 컨플렉스콘, 스니커콘 등 마니아들이 참여해 리미티드 제품을 구경하고 이를 즐기는 행사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국내에도 스니커즈 마니아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기획하기에 이른다.

와디는 구독자가 3만에 달했을 때 자신 혼자 직접 조금씩 돈을 모아 행사를 기획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장소를 제공하기로 했던 업체와 틀어지면서 행사 개최는 물거품이 될 뻔했다. 그 때 미국에서 국내에 스니커즈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 넘어 온 스택하우스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와 함께 하자” 와디는 스택하우스와 손 잡고 ‘스니커하우스’라는 행사를 만들었다. 강남에서 열린 첫 회 행사에는 300명이 왔다. 이 후 입소문이 퍼지면서 늘어나기 시작해 4차 행사에는 3천 8백 명의 마니아들이 몰렸다.

올 해 용산에서 연 스니커하우스 번외편 캠프에도 2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렸다. 여기서는 청주 크래프트 비어 브랜드 칠홉스와 협업해 이 행사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수제맥주를 신발 박스에 넣어 판매했다. 바로 완판. 수익금은 기증했다.

스니커하우스 3차 행사때 특수 염료 회사와 손잡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얼굴 문양을 넣은 티셔츠를 만들었다. 빛을 받으면 얼굴 문양이 빨갛게 바뀌는 효과가 있다. 물론 40분 만에 완판했다. 수익금으로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20만원 상당의 나이키 운동화를 돌렸다.

국내에도 유명 스니커즈마니아 행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규모로는 일본의 아트모스콘을 압도했다. 스니커하우스에서는 희귀 스니커즈를 전시하고, 리셀러들은 제품을 팔며,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다. 스니커즈 인디 브랜드도 참여하는 스니커즈와 스트리트 문화를 공유하는 행사이다.

와디는 이 행사에서 공개방송도 진행하고 스니커즈를 주제로한 토론과 토크쇼도 진행해 이목을 끌었다.

와디는 “실제 미국의 컴플렉스콘에는 굉장히 많은 브랜드의 협업 제품이 출시된다. 그 곳에서만 판매하는 제품을 구경하고 사기위해 마니아들은 하루에 80달러를 내고 들어간다. 물론 제품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의 시작, 휠라와의 만남

휠라의 제안을 받은 와디는 흔쾌히 승낙했다. 휠라와 와디의 협업 소식은 스니커즈 마니아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휠라는 와디에게 휠라의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아카이브를 모두 보여주었고 와디는 그 중 자신이 원하는 소재와 색상을 제안했다. 휠라는 이를 바탕으로 협업 제품을 만들었다.

수량은 단 100족. 와디의 주문 사항이었다. 이 제품은 휠라 플래그십 스토어 한 군데, 공식홈페이지, 무신사를 통해서만 판매됐다. 휠라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출시 전날 밤 12시 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 발매 즉시 50족 모두 완판, 무신사와 공홈에서는 50족이 1초만에 완판됐다.

와디는 휠라 매장 앞에 마니아들을 줄 서게 했고, 희소성을 극도로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이 제품의 가격은 6만 9천원. 발매 다음 날 리세일 시장에서 세 배가 넘는 15만원에서 많게는 20만원 상당의 가격으로 거래 되었다고 한다.

와디는 휠라와의 협업에 대해 “마니아가 할 수 있는 덕질의 끝을 경험했다. 행복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와디는 스니커즈 전문 서적도 출간했다. 국내 유명 스니커헤드 10명과 함께 스니커 100선을 담았다. 와디는 일본에 갔을 때 서점에 들렀다 큰 충격을 받았다. 서점 한 벽면 책장이 모두 스니커즈 관련 책 이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스니커즈 시장이 작지 않은데 왜 전문 서적이 없을까 생각하다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하고 국내 처음으로 스니커즈 관련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마니아들에게만 팔렸지만 마니아들은 이 책을 쓴 스니커헤드를 만나 책에 사인을 받기도 하고 그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와디는 휠라와 두 번째 협업도 추진 중이다. 시점과 방법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

&lt;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국내 유일 스니커즈 행사 스니커 하우스&gt;

<와디와 스텍하우스가 기획한 국내 유일 스니커즈 행사 스니커 하우스>

덕질로 번 돈, 좋은 일에 쓰기

와디는 자신의 유명세로 번 돈을 좋은 일에 쓰고 있다.

와디는 스니커하우스 행사에서 자신의 신발 중 제일 비싼 것을 내놓아 경매 수익금으로 운동화를 구매해 고아원의 중고 남학생에게 선물했다. 고아원 한 아이당 일 년에 신발 구매 비용은 약 10만원 정도라고 한다. 와디는 나이키 조던맥스, 아디다스 울트라부스트 등 고가의 제품으로 전부 다른 모델에 색도 모두 다르게 사줬다.

이 후 프랑스 패닉피자클럽 이라는 브랜드에서 연락이 와 함께 제품을 만들어 여자아이들 것도 사주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제품 역시 하루만에 품절됐다. 그 수익금으로 초등학생까지 모두 사주었다.

운동화를 구매할 때도 온더스팟, 아트모스 같은 온라인 스토어에서 50% 할인해 주면서 더 많은 제품을 고아원 아이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에서 60만원 상당의 패딩 4개를 증정해줘 지난 달 30일 증정식을 가지기도 했다.

“좋은 기운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의 고아원에 다른 이벤트로 수익을 내 또 좋은 운동화를 주고 싶다. 내가 특별히 들이는 것 없이 마니아들은 굿즈를 구매해서 좋고 아이들도 좋고 서로서로 좋은일 인 듯하다”


와디는 회사일도 즐겁게

와디는 회사일도 즐겁게 한다. 양쪽일 모두 만족하면서 자아실현도 하고 있다. 유튜브도 재밌고 회사일도 좋다. 주말에는 행사와 파티에 참석해 힐링하고, 독자들과 스니커즈 브랜드가 보내주는 신발은 하루에 하나씩 택배로 온다.

한 가지 고민은 지금처럼 두 가지 일을 함께 해야 할지 유튜버와 행사 기획에 집중해야 할지다.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를 업으로 할 경우 수입에 대한 스트레스로 스니커즈에 대한 열정이 식을 수도 있을까 걱정도 되기 때문이다.

미국 컨플렉스 스니커 채널은 음악과 스니커즈를 엮어 새로문 문화 채널을 만들고 있다. 와디는 우리나라의 멋진 장소와 함께 스니커즈를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구독자들의 반발 없이 방송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을 항상 고민한다.

와디는 “옷이든 신발이든 내가 소개하는 제품들은 나만의 굿즈일 뿐이다. 문화를 움직이는 브랜드가 될 수는 없다. 내 역할은 스니커즈 전문 브랜드를 응원하면서 함께 만들고도 싶고, 스니커즈 시장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국내에서도 아이앱스튜디오, 99%is, 피스 마이너스원 등 같은 브랜드들이 많이 나와서 함께 스니커즈 시장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부산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세계의 편집숍에 입점하는 그런 세상을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자전거 덕후, 바이크웨어를 만들다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

&lt;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가 자신이 매일 타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아덴바이크 안형선 대표가 자신이 매일 타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한 자전거 덕후가 바이크웨어를 만들었다.

그 주인공은 아덴바이크를 만든 안형선 대표다. 안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스포츠 마니아였다. 인라인, 자전거 등 운동을 좋아해 남들 공부할 때 운동을 했다. 오클리 선글라스도 좋아했다.

당시 국내에 오클리 선글라스가 판매되지 않고 있어 이 제품을 수입해 알음알음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 개를 팔면 7~8만원이 남았다고 한다. 판 돈으로 두개를 사고 두개 팔아 남은 돈으로 또 5개를 사고, 그러면서 월 수익은 100만원을 넘었다.

처음에는 중고로 사서 판매하다 오클리 선글라스 수입 업체를 직접 찾아가, 판매 대행을 요청했다. 업체는 흔쾌히 제품을 공급해 주었고 안 대표는 선글라스를 인터넷 오픈마켓에 팔며 종잣돈을 모았다. 안 대표가 이를 잘 팔자 오클리 미국 본사에서 연락이 와 직접 팔아달라고 했고, 더 큰 사업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사다

대학교 때 번 돈으로 비싼 자전거를 구매했다. 그 나이 또래에 살 수 없는 MTB 자전거를 사서 실컷 타고 다녔다. 이후 자전거 용품, 미국에서 유행하는 디스커버리, 나이키 등 팀복을 사다 팔았다. 팀복은 뜨루드 프랑스, 레플리카 등 선수들이 입는 옷이다.

섬유공학을 전공한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원단 회사에 들어갔다. 원단 회사에서 갭, 올드네이비, 신성통상, 이랜드, 리바이스 등 다양한 기업과 거래했다. 회사생활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월급도 작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3년 쯤 다녔을까.

안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새벽 3시까지 병행 수입 일을 하면서 내 사업을 위한 돈을 모았다. 매월 1천만 원씩 벌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돈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보람이 없었다. 내 일을 내가 직접하면 효율적으로 내 시간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쓰러질 때까지 밤새 일해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자전거. 그러나 자전거 옷은 입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는 예뻣지만 너무 비싸고, 국내 브랜드는 기능성이나 디자인 면에서 많이 떨어졌다.

자전거를 직접 하면서 어떤 옷이 편한지 알게 됐다.

&lt;안형선 대표가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안형선 대표가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공장을 찾아가다

처음에는 원단 밖에 몰랐기 때문에 패턴이나 공장이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무작정 봉제 공장을 찾아가 옷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시도 많이 당했지만 갖고 있던 돈을 먼저 주고 만들어 달라고 했다.

스타일을 처음에는 2개, 6개, 10개 계속 늘려 나갔다. 수입 사업으로 번 돈을 제조에 투자했다. 1스타일을 소량으로 몇 백장만 만들어도 2천만 원 넘게 들었다. 제품은 직접 활동하던 동호회나 마니아들 위주로 팔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함께 했던 커뮤니티에서도 잘 팔렸다.

국내 판매 제품들은 패션을 무시한 멋이 없는 옷들 뿐이었다. 직접 디자인하고 내가 자전거 타면서 입고 싶은 옷을 만들었다. 원단도 직접 개발했다. 매쉬 원단, 라미네이트필름, 안감 스판트리코트 원단을 붙여 합복을 하는 등 원단을 만들고 봉제공장도 인수해 직접 만들어 원가를 대폭 낮췄다.

패턴도 입체패턴을 적용했다. 자전거 탈 때 자세에 맞춰 팔은 꺾이고 앞판은 울지 않게, 어깨도 안으로 굽어지게 만들었다. 바지 안에 들어가는 패드도 다양하게 수입해 공급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불편한 옷, 자전거 탈 때는 세상 편한 옷이 만들어졌다.

품질은 높이고 단가는 낮추니 자전거 마니아들이 몰렸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드니 고객들도 좋아했다. 내 맘에 안 들면 다른 사람도 안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바이크 마니아 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내 브랜드 중 가장 많이 팔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바이크웨어로는 1등

안 대표는 자전거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도 자전거를 꾸준히 타고 있다. 도로사이클 연맹 같은 조직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조직원들과, 직원들도과도 주기적으로 자전거를 탄다. 매일 아침 40km 씩 자전거를 탄다.

마케팅도 쉬지 않는다. 공식적인 크루를 모집해 연간 300백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 MCT선수들과도 스폰서십을 맺고 옷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내년에는 큰 차를 빌려 자전거 전국 일주도 계획하고 있다.

매장도 열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무조건 자전거 길에서 옷을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 주변에 매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직영점으로 운영하다, 자전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둘씩 대리점으로 운영권을 넘겼다. 그들이 비수기에 매출이 줄어들까 여러가지 아이템도 지원해주고, 커피 등 음료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나만 잘 살기보다 점주들도 돈 잘 벌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대표는 올해 프리미엄 브랜드 ‘치즈 사이클링’을 인수했다. 고급 소재를 사용하고, 디자인도 차별화했다. 인수와 함께 ‘치즈 사이클링’을 론칭했던 멤버도 함께 데려왔다. 그 역시 자전거 덕후이며, 홍대 아티스트 출신이었다. 자전거 웨어에 스트리트 감성을 접목해 독특한 디자인으로 마니아층을 흡수하고 있다.

&lt;안 대표가 자전거 덕후인 직원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gt;

<안 대표가 자전거 덕후인 직원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직원들도 모두 자전거 덕후

어느 날 한 직업 군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군생활을 그만두고 미국에 가 LA부터 뉴욕까지 자전거 횡단을 하겠다며 옷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안 대표는 옷을 줬고 그는 정말 몇 만 km 거리의 미국을 횡단했다고 한다.

중간 정도 갔을 즘 그는 안 대표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내가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돌아오면 내가 채용해 줄테니 완주하고 돌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 직원은 지금까지도 근무하고 있으며 바이크 선수생활을 하면서 아덴바이크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것도 중요하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그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안 대표의 판단에서 였다. 안 대표는 주말에는 무조건 직원들과 자전거를 타고, 만나는 사람들과 제품을 이야기 하고 건의 사항은 언제든지 제품에 반영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해외 사업도 시작

자전거 웨어 외에 병행 수입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 오클리, 루디 등 을 수입해 판매하고 올 해는 스노우고글도 직접 제조해서 판매할 계획이다. 미국 법인도 세웠다.

과거 수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 법인에서 직구로 국내고객에게 판매하면서 다양한 이점을 가져간다. 판도라, 샘소나이트, 어그부츠 등을 파는 재미도 솔솔하다.

미국 거래량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등 해외 지역에도 디스트리뷰터를 두고 옷을 팔고 있다. 해외 각지에 디스트리뷰터도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계약한다. 대만 친구들은 매년 한국에 와서 부산 서울 까지 함께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CD가 나오면서 카세트가 사라지고 MP3가 나오면서 CD가, 모바일이 나오면서 MP3 사라지지만 자전거는 오토바이, 자동차, 전기 자전거가 나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자전거를 타겠죠. 스노우보드는 어느 정도 보드를 타다 나이가 들면 못타지만 자전거는 나이가 들어도 힘들이지 않고 건강을 지켜주는 좋은 친구 입니다”

자전거 덕후는 그렇게 옷을 만들고 있었다.


클래식 덕후, 클래식이여 영원하라

유니페어 강재영 대표

&lt;강재영 대표. photo 모지웅 기자&gt;

<강재영 대표. photo 모지웅 기자>

옷차림도, 생활 방식도 점점 더 캐주얼해지는 요즘 시대, 어렵게 만들어진 값비싼 신발이 굳이 필요할까요? 그러나 ‘제대로 된 좋은 구두’를 신는다는 것, 일종의 문화를 지키는 태도이자 낭만을 표현하는 세련된 방식과도 같습니다."

"만약 특별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만찬에 격식을 갖춰 입고 신고 간다면, 동행한 상대방은 물론 스스로도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상황에 맞게 입고 신는 태도는, 남자의 일상에 남겨둬도 괜찮은 규율이자, 기분 좋은 우아함입니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고객이 아니라 문화를 동경

신사동 가로수길 안 쪽 골목, 화려한 쇼윈도와 큼지막한 간판이 걸린 주변 매장과는 눈에 띄게 다른 매장이 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블루(엄밀하게 로열 블루)도어가 마치 뉴욕 5번가의 레드도어 살롱을 연상시킨다.

이 곳은 브랜드명 그대로 ‘당신을 위한, 세상에서 단 한 켤레뿐인 구두’를 선보이는 정통 클래식 슈즈 숍 ‘유니페어’다. 에드워드 그린, 존롭, 알든, 파라부트 등 세계적 명성을 가진 수제화와 함께 한국인의 발 모양에 맞춰 자체 제작한 구두, 슈케어 브랜드 ‘릿슈’로 구성되어 있다.

강재영 대표를 만나러 간 날(지난달 29일)에는 마침 영국 최고의 비스포크 슈트 메이커 ‘앤더슨 앤 쉐퍼드(Anderson & Sheppard)’와 비스포크 슈즈 ‘에드워드 그린(Edward Green)’의 합동 트렁크쇼가 열리고 있었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양복’으로도 잘 알려진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cutter)가 예약 고객을 위해 체촌, 가봉을 하고 ‘에드워드 그린’의 MTO, 탑 드로어(Top Drawer), 기성제품 사이즈 오더를 진행하는 행사. 커터가 6개월에 한 번 방문해 2~3차례의 가봉을 해야 하는 까닭에 ‘앤더슨 앤 쉐퍼드’의 슈트 한 벌을 입기 위해서는 최대 1년 반을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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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영(사진 제일 왼쪽), 강원식 형제가 ‘앤더슨 앤 쉐퍼드’의 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모지웅 기자>

진한 싱글 몰트 위스키 향이 가득한 속에 전신 거울 앞에 선 멋쟁이 고객과 체형을 세심하게 체크하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커터. 1년이 넘도록 옷 한 벌을 짓고, 기꺼이 인내하겠다는 그들의 모습은 꽤나 멋있으면서 또 생소했다. 기성복 중에서도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 유명한 브랜드가 적지 않은데 말이다.

강 대표는 “만 11년 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슈트 문화를 알아야 (구두까지) 비로소 클래식 스타일을 즐기고, 갖춰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판매장이 아니라 클래식의 로망이 묻어나는 공간, 이런 문화를 이해하고 향유하고자하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자는 거죠.”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유니페어’는 근대 복식의 원류(源流)이자 클래식 문화의 중심에 있는 유럽의 브랜드를 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번 합동 트렁크쇼도 몇해 전 강 대표가 영국에 찾아가 슈트를 맞추면서 비즈니스 제안을 했던 결과다. 물론 한 번에 협업이 이뤄진건 아니다.

“경험을 해보고 확신이 서면 제대로 전달할 수 있죠. 클래식 슈즈를 공부하려면 슈트를 모를 수가 없어요. ‘앤더슨 앤 쉐퍼드’도 경험해 보는 것이 최고의 학습이라고 생각했죠. 처음엔 그들이 한국에서 뭘 해보겠다는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저희와 먼저 거래를 시작한 ‘에드워드 그린’이 역할을 해줘서 올 1월 삐띠워모에서 만나 뜻을 모았습니다.”

강 대표는 경제적 여유가 클래식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유일 조건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알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속에 경제적 여유는 윤활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은 어떻게 ‘클래식’에 빠졌고, 대박을 기대할 수 없는 시장에서 10년이 넘게 사업을 이어오고 있을까. 강재영 대표는 2008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일 치르꼬’라는 남성용 구두 전문 편집숍을 냈다.

처음에는 가장 먼저 출근해 진열되어 있는 구두를 닦는 일이 그의 업무였다. 2011년 ‘유니페어’로 리뉴얼했고 인큐베이팅한 브랜드 중 ‘드레익스’와 ‘파라부트’는 각각 서울 도산, 한남점을 오픈했다.

올 4월 광주광역시에 생긴 두 번째 ‘유니페어’ 매장은 매니저를 지낸 김해룡 대표가 고향에서 경험과 뜻을 펴 보겠다고 해 열게 된 매장이다.


‘함께 즐거운’ 일을 찾은 형제

강재영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코리아에서 마케터로 일하다 남성용 구두 전문 편집숍 ‘일치르꼬’를 창업하며 패션업계에 뛰어들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와 ‘일을 저지르는게’ 된 데에는 형인 강원식 코넥스솔루션 대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코넥스솔루션은 국내에 ‘착한 패션, 착한 소비’ 바람을 일으킨 슈즈 ‘탐스’를 도입했고 그라미치, 유니버셜 오버롤즈, 와일드씽즈 등 마니아층이 탄탄한 브랜드를 소개해 온 회사. 올 여름에는 형제가 함께 포토저널리즘의 효시가 된 매거진 ‘라이프’의 서브 라이선시로 제조업에도 도전했다.

강 대표는 “함께 좋아하는 것을 해왔다”고 이야기한다. 브랜드 스토리와 퀄리티에 호감이 생기면 제품을 먼저 사서 입거나 신어 보고 사용하면서 ‘공부’를 먼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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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부터 형과 함께 ‘나이키 에어조던’ 시리즈를 모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 ‘나이키 덕후’였고,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나가 ‘맨즈논노’를 구해 보면서 ‘우리에겐 왜 이런 멋진 남자 옷이 없을까’ 아쉬워했던 것이 사업으로 이어졌다는 설명.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덕질은 느리지만 차곡차곡 영글고 있다. ‘유니페어’는 신세계인터내셔날 자사몰인 ‘에스아이빌리지’에 입점한데 이어 올 가을 신세계백화점의 남성 편집숍 ‘맨온더분’과 손잡고 ‘유니페어 컬렉션’을 내놨다.

리테일러와 협업해 자체 개발한 첫 라인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의 발 모양과 그에 맞는 최적의 소재와 디자인을 적용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경영이 취미생활은 아니죠.” 안정적 수익구조를 만들었는지 물어 본 데 대한 강 대표의 답이다.

‘가치’가 인정받는 날을 기다리며

강재영 대표는 “우리 패션시장, 소비자가 진정한 ‘가치’에 호응하는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일을 할 수 있는 한 패션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유니페어’가 운명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유니페어’가 전하고 싶은 문화와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찾아 전개하면서, 브랜드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마저 명품이 아닌데 비싸다거나 사용기간이 짧다는 등 이유로 팔리지 않고 사라지는 현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공급자로서의 자기반성도 덧붙인다.

“종종 우리 사회가 진짜 가치를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브랜드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걸 바꾸지 않고 싶은데…. 싼 가격, 유명 브랜드를 쫓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치를 인식하는 수준이 높아졌으면 하는 거죠. 시장이 양극화되니 공급자들도 하나라도 더 팔리는 것만 찾고 정당하지 않은 방식도 불사하게 되지 않나, 돌아봤으면 합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대선제분 공장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Interview

박상정 아르고스 대표

박상정 아르고스 대표


18,900제곱미터, 약 5,700평.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3가 9번지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 부지다. 대형 쇼핑몰 경방 타임스퀘어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 원통형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83년 된 밀가루 공장이다.

영등포에 위치한 대선제분 공장

영등포에 위치한 대선제분 공장

원통형 건축물은 밀가루 공장의 핵심시설인 사일로(곡물 저장창고)다. 영등포 제분공장은 1936년 문을 연 밀가루공장으로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80년여 년 간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보기 드문 시설이다. 지금은 대선제분이 평택항에서 가까운 충남 아산시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가동이 중단됐다.

이르면 내년 3월 이 곳은 상업 시설이 들어선 1,650㎡ 광장에 복합문화공간이 된다. 서울시 1호 민간주도형 도심재생 사업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시는 23개 동을 아우르는 대지면적 총 18,963㎡ 규모의 영등포구 문래동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도시재생 구상안을 발표했다.

시가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을 둘러싼 50만㎡에 달하는 문래동 일대 지역의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면서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의 복합문화공간 조성 사업도 시너지가 날 것으로 보인다.

대선제분 폐공장도 밀가루 대신 문화를 생산하고 사람이 모이는 ‘문화공장’으로 탈바꿈해 개장된다. 사업은 토지주 대선제분으로부터 재생사업과 관련한 재생계획 수립 및 사업 시행 권한을 위임받은 아르고스가 사업비 전액을 부담해 재생계획 수립부터 리모델링, 준공후 운영 등 전반을 주도해 진행한다.

아르고스는 대선제분 창업주의 손자 박상정씨가 운영하는 부동산 개발 기업이다. 14일 여의도에서 박상정 대표를 만나 대선제분 공장 재생 사업과 관련한 콘셉트와 방향을 물었다.


Q. 대선제분 공장은 어떤 공간인가?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은 서울 도심내 위치한 80년이 넘은 공장으로 과거의 원형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서울에 몇 안남은 소중한 산업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영등포 공장은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영등포에 건설된 밀가루 공장이다.

1958년 대선제분이 인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사일로, 제분공장, 목재창고, 대형창고 등 총 23개 동으로 구성된다. 공장이 지어졌을 당시 영등포는 방직·제분 등 다양한 공장이 입지한 제조 산업 거점공간이었다. 대선제분 동쪽으로는 경성방직, 서쪽으로는 종연방직 경성공장 등이 이웃했지만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상업시설(타임스퀘어)로 바뀌어 과거 흔적이 사라졌고, 대선제분만이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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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새롭게 조성되는 복합문화공간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사업은 2단계에 걸쳐 추진된다. 사업 추진을 위해 서울시를 통해 상업 시설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 조성 인·허가를 받았다. 먼저 1단계 마중물사업으로 공장 원형을 최대한 유지한 채 상업 공간과 전시·공연, 오피스 등을 조성한다. 전체 23개 동 가운데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14개 동(13,256㎡)이 대상이다.

대형창고(1936년 건축, 2,126㎡)는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는 가변적 상업공간으로서 조성될 예정이다. 정미공장(1936년 건축, 1,167㎡)은 기획 전시장, 기업 홍보 갤러리, 근린생활시설 등으로 활용된다. 식당(1936년 건축, 1950년 화재 후 신축, 555㎡)은 기획 전시공간 및 고급 레스토랑으로 조성되며, 목재창고(1936년 건축, 1,272㎡)는 창고 내 수많은 기둥을 활용한 숲 같은 내부 환경으로 꾸며 근린생활시설, 전시 대관 및 조망가능 공간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2호 창고(1936년 건축, 2,498㎡)는 증축을 통해 높은 천장고를 활용한 공공전시관, 창업지원공간과 공유오피스 등 공공지원 공간으로 조성하며, 사무동(1936년 건축, 1,499㎡)은 증축 을 통해 제분산업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근현대산업 역사를 기록하는 전시관 및 사무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Q. 공장 건물을 보존하고 증축과 리모델링으로 조성한다고 들었다

대선제분은 영등포 공장 이전 계획을 지난 2008년부터 수립 했다. 미국 워싱턴주립대를 졸업하고 외국계 부동산 투자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을때다. 2011년쯤 일 것 같다. 대선제분 공장을 아산시로 이전 소식이 들렸다. 소유주인 대선제분은 당초 매각을 검토했다. 충남 아산으로 공장 이전을 완료한 2013년까지 2년간 회사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대선제분은 임대료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아르고스에 개발을 일임했다.

그때부터 매각 대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장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상 공간으로 조성해 오랜동안 가치를 지속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다. 답은 보존을 통한 공간 브랜딩, 그렇게 공간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롯데월드타워, 코엑스몰 등 물리적 랜드마크는 자본이 있다면 가능하다.

반면 정서적 랜드마크는 스토리가 있어야 된다.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바꾼 런던의 ‘테이트모던’ 등 해외 도시의 공간 브랜딩과 재생 사례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직접 유럽 곳곳을 다녔다. 우리와 달리 건축적 역사도 오래됐고 상대적으로 건축물 훼손도 덜 된 그곳의 공간 활용을 보면서 상 공간에 대한 발상을 뒤집어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쇼핑몰에 식상함을 느낀 이용자가 성수동이나 한남동의 복합문화 공간을 찾고 새로운 형태의 상 공간을 갈증하고 있다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조성된 공간에서 어떠한 액티비티 콘텐츠를 기획느냐 것이다. 실제 조성될 공간에는 1,650㎡에 달하는 광장이 있다.

이 곳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고 이용하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쇼핑을 하고 싶을 때 이용하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될 상업, 문화, 전시 공간은 80년이 넘은 과거의 모습에서 즐길 수 있게 개발 중이다.

Q. 당초 계획보다 착공이 늦어지고 있다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서울시와 복합문화공간 기능을 놓고 협의가 길어진 것과 국내에서는 오래된 건축물을 보존하면서 리모델링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시공사가 많지 않아 업체 선정 과정이 길어진 영향이 크다.

건축물의 안전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인데 비용 면에서도 허물고 짓는 것보다 곱절로 드는 큰 사업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성도를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예를 든다면 100미터가 넘는 창고로 쓰이던 목조 공간이 있는데, 기둥이 없는 무주공간 설계로 되어 있다고 하자.

이 곳에 보를 세워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에서 건축물을 들어 올려 구조물을 고스란히 살린다.

이 곳에 카페나 의류 상점을 낸다고 가정하자. 새로울 것이다. 이처럼 파트너사(임차인)가 물리적 요소를 잘 갖춘 건축물과 광장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집객을 높여 시너지를 내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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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상 공간은 어떻게 조성 되는가?

1단계에 판매 시설이 들어선다. 구체적으로 언급할수 없지만 카페, 레스토랑, 패션 등 다양하다. 다만 흔한 대형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지양하고 있다. 그 다음 문화집회시설, 사무업무 용도의 시설이 조성될 계획이다. 오랜 시간 상업용 부동산 투자 펀드 매니저로 일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처음부터 매각 모델이 아닌 조성 계획부터 준공 후 운영 등 전반을 맡기 때문에 상 공간의 차별화에 역점을 뒀다. 지속가능한 공간 브랜딩을 위해서는 당연히 재무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 파트너사(임차인) MD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직접 언급할 수 없지만 최근 국내 성수동에 매장 오픈을 앞둔 커피 브랜드가 찾아와 공간을 보고 갔지만 입점은 담보할 수 없을 만큼 콘텐츠 구성에 신경을 쓰고 있다. 단순한 임대업이 아니다. 낙후된 문화 소외지역 한 블록 면적에 문화 공간이 조성되는 일이다. MD가 잘 갖춰진 공원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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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간 브랜딩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들었다

유럽과 가까운 일본만 봐도 공간 브랜딩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상 공간이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 지난해 시와 함께 문래동 일대 도시재생 사업과 맞물려 민간주도형 개발 선포식 당시 공간의 의미를 정립했다.

사실 재생사업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사전적 의미로 재생은 낡고 못쓰는 것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 공간은 아직도 공장으로, 창고로 쓰임이 있다. 다만 건축적 가치를 제고해 다른 공간으로 재발견 한 것이다.

내년 개장할 복합문화공간의 이름도 이미 정해졌지만 보안상 공개가 어렵다. 영등포 공장이 대선제분으로 불리지 않길 원하는 새로운 이름이다. 대선제분 공장으로 80년의 스토리텔링이 되었다면 앞으로 100년은 다른 이름으로 공간을 브랜딩할 생각이다.

사람들이 대선제분 공장을 보전 하겠다고 하니 믿지 않는다. 부동산이라는 것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대선제분은 가업이다. 문래동 공장은 기업의 발상지다.

폐쇄된 화력발전소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관이 된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옛 맥주 양조장을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한 베를린의 ‘쿨투어 브라우어라이(Kultur Brauerei)’처럼 지역의 애물단지였던 낡은 공간의 재창조를 통해 영등포 일대 부족했던 문화 인프라를 확충하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목표다. 상 공간의 가치 제고에 변화의 패러다임이 될 것으로 본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

OTD 가치의 재발견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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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맞선 유연함이 리테일 플랫폼의 원동력”


유통업계에서는 단순 브랜드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미는 ‘라이프스타일 공간' 기획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 부동산 업계는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상품 판매 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물건말 팔던 유통업과 공간만 제공하던 부동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 블러(Big Blur)’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동안 부동산 개발 및 건설 업체들은 토지를 사고 건축물을 지어 분양하는 하드웨어 공급자로서의 역할만으로도 성장 시대의 풍부한 수요를 바탕으로 수익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공급 중심의 시장이 아닌 사용자 관점에서 공간이 어떤 차별적 편익과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지가 관권이 되었다.

최근 ‘현대판 5일장’ 띵굴 시장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포맷을 전환하며 손창현 OTD코퍼레이션 대표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뜨겁다. 공간 기획 분야 전문가 손창현 OTD코퍼레이션 대표가 국내 최대 플리마켓 띵굴 시장에 투자하면서 지난 달 28일 롯데원드점에 ‘띵굴'의 3번째 정규매장을 오픈, 본격적인 사업확장이 예고되고 있다.

이밖에도 신개념 서점인 아크앤북과 ‘공유 공장'의 개념을 도입한 성수연방을 선보이는 등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손 대표는 서울시립대 건축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딜로이트안진 부동산 재무자문, AM플러스 상업시설개발 운영팀, 삼성물산 개발사업부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부동산 디벨로퍼가 최근 리테일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그가 상공간을 근간으로 다양한 포맷의 사업을 확장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궁금해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Q. OTD코퍼레이션이 생각하는 공간 플랫폼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특정 건물 내 공간을 새롭게 기획하고 콘텐츠를 채워 넣는 것이다. 하지만 OTD가 하고 있는 공간 플랫폼 사업은 단순히 공간을 만들어내는 1차원적 관점으로 설명되기에는 부족하다.

버려져 있거나 오랫동안 방치된 공간들에 콘탠츠를 넣어 가치를 높이는 일들을 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쉽게 한마디로 정리하면 ‘공간 가치의 재발견'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단순히 공간을 인테리어로 차별화를 두어 선보이는 리뉴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근원, 위치, 타겟, 라이프스타일 등 심층적 접근을 통해 잠재된 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일들을 하고 있다.

Q. 여러 지역에 다양한 포맷과 성격의 공간 플랫폼을 오픈했다. 적합한 공간을 찾고 콘템츠를 기획, 구성할때 상권, 플랫폼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이 무엇인가.

소비자의 트렌트, 부동산 시장의 변화를 읽고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역의 저평가된 공간에 가치과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협업을 통해 주변 상권까지 부활시켜 활력을 불어 넣고 가치를 더하는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다.

쉽지만 어떤 콘텐츠를 채우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공간의 자산 가치가 달라진다. 그래서 공간을 만들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콘텐츠나 사이트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철저히 고객의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어떤 것을 먹고 싶은지, 어떤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지 등,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점을 고민한다. 다른 업체들이 요즘 핫한 맛집이 어딘지, 그 아이템들을 선보이기 좋은 장소가 어딘지를 찾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부동산 입대업으로만 접근했다면 셀렉트 다이닝이라는 개념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고 현재까지의 형태로 유지되기 어려웠을 거다. OTD가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를 보더라도 셀렉트 다이닝이라는 형태는 같지만 각기 다른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버더디쉬가 한국 사람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맛집이나 디저트 가게등을 중심으로 구성했다면 수제 맥주와 양식 전문점인 파워플랜트나 지역 맛집과의 상생을 토대로 시작된 마켓로거스는 목표 소비자층이 좀 더 명확한 공간이다.

그 자라에 머무르지 않고 매번 공간을 만들때 마다 이전의 우리가 부족한게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이 어떤 것드레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의 확장된 공유 리테일 플랫폼으로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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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새로운 프로젝트로 소개된 성수연방이 주목을 받고 있다. 식음료에서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장하는 것인가.

맞다. OTD를 창업할 당시만 해도 바이오. IT쪽 스타트업은 많았지만 외식업 분야는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른 분야보다 외식업 분야가 사업을 진행하는데 제약이 많지 않아 조금 수월하게 되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시작하게 됬다.

하지만 F&B 모델만으로는 플랫품을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계속해서 진화된 버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F&B를 넘어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플랫폼들을 고민하면서 지금의 공가을 개발하게 됐고, 또 만들어가게 있다.

Q. 성수연방이 복합문화공간,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소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규모이자 또 다른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성수연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을 상징적으로표현하고 싶었다. 그동안 버려진, 혹은 방치된 공간에 콘텐츠를 입혀 가치를 만들어가던 OTD만의 철학이 건물적 차원으로만 접근했다면, 성수연방은 한단계 더 나아가 도시적 관점으로 규모를 키운 저희에게도 도시재생 측면에서도 유의미한 프로젝트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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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라이프스타일숍, 다양한 F&B 매장뿐만 아니라 생산 공장, 문화 공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미식, 휴식, 체험이 가능한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해외에도 없는 새로운 유형의 복합문화공간이다. 대표적인 도시재생 성공 지역으로 꼽히긴 하나,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공간은 아직 많지 않다고 본다.

성수동뿐 아니라 도시재생을 시도하고 있는 여러 사례들 중 안타까운점은 단순히 공간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점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장 지대였던 기존의 폐건물에 인테리어적 요소만 입혀내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도시재생의 성공을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한때 제조업의 메카였던 성수동만의 무드를 반영하여 생산-소비-유통이 한곳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유형의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으로 선보이게 됐다. 자급자족 형태로 운영되던 고대 길드 사회에서 착안한 ‘연방'이라는 네이밍도 그래서 붙여지게 됐다.때문에 이러한 특징들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감도 높은 스몰 브랜드를 발굴하여 함께하고 있다.

많은 소상공인 분들이 법적인 규제에 적합한 제대로된 생산 공장을 갖추기에는 비용이나 환경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그런 부분들을 성수연방에 입점하게 되며 지방이 아닌 시내에 자체 생산 시설을 확보할 수 있어 빠른 물류 유통이 가능하다.

본인들의 기본 유통 채널 외에도 우리와 연계된 다양한 플랫품을 통해 추가 판로를 확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존 복합문화공간들과도 확연한 차이를 가지는게 바로 이러한 점이다.

성수연방 내 생산 시설에서 만들어진 식재료를 공간 내 입점된 F&B 매장에서 푸드로 선보이고 그럿들이 소비되는 형태의 선순환 구조가 성수연방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Q. 성수연방에 추가될 콘텐츠가 있는가.

성수연방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인 생산-유통-소비를 완성하게 해줄 생산 시설이 이달 말 완공 예정이다. 육가공 제품으로 유명한 존쿡델리미트의 매장과 공장(팜프레시)이 함께 있어 공장에서 만들어진 재료가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의 다른 스토어를 통해 유통이 되기도 하고, 바로 아래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메뉴 형태로도 즐길 수 있다.

또 생산 시설내 투어 및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바로 나온 제품들을 시식할 수도 있다. 신선한 재료를 활용한 쿠킹클래스도 참여할 수 있는 등 단순히 생산의 기능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성수연방은 각 구성원들 간의 가치를 공유하고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고 상행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해 나가고 싶다. 로우로우와의 협업해 만들어진 아크앤북, OTD의 청년 사업 육성의 일환인 오버 더 드림(OVER THE DREAM)에 의해 탄생하게 된 브랜드 피자시즌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구성원 뿐 아니라 방문하는 고객 분들에게도 단순히 소비를 위한 목적성 공간이 아닌 평이한 일상속 끊임없는 영감과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공간들로 만들고자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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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띵굴스토어를 성수연방 콘텐츠로 구성했다. 패션과 뷰티 분야로 사업 확장 계획이 있는가.

을지로와 성수동에 선보인 띵굴스토어1,2호점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띵굴(Thingool)’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잏는 쇼룸 공간의 형태로 선보이게 된 매장이다. 지난 2월 말 오픈한 3호점인 롯데월드몰점은 기존에 오프라인 쇼룸 형태로 선보인 매장들과 다른 새로운 유형의 리테일 스토어다. 메이저 유통 채널인 복합쇼핑몰로 진출하며 강남 및 잠실 상권은 물론 경기 인근 지역의 상권까지 브랜드를 넓혀 나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유통 채널뿐만 아니라 상품 구성에서도 패션, 뷰티 카테고리를 집중적으로 강화했다.

‘로우 투 로우’ ‘H8’ ‘모한’ 등 디자이너 브랜드와 뉴트로 감성의 빈티지 팝업 마켓 ‘밀리언 아카이브’ 오가닉 및 클린 뷰티 컨셉의 다양한 인디 뷰티 브랜드까지 띵굴 고유의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엄선하여 큐레이션한 아이템들을 제안하고 있다.

이 외에도 리빙, 키즈, 홈데코 등의 품목과 더불어 합리적인 가격대의 PB ‘신생활’을 통해 삶의 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 다양한 제품들을 두루 선보이고 있다. 곧 뷰티 카테고리 서브 브랜드인 ‘띵굴 브라이트’를 준비하며 공간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터로 활약 중인 양태오씨가 한의사, 갤러리 큐레이터와 함께 설계한 한방 화장품 ‘이스 라이브러리’도 띵굴스토어와 함께하는 방향을 논의 중에 있다.

또 파이콜로지라는 완도지역 미역에서 추출한 소재로 화학성분이 없는 천연 뷰티 브랜드가 띵굴스토어와 함께하고 있다. 두 브랜드 모두 프리미엄 브랜드이기 때문에 매스 브랜드만 모아 놓은 올리브영과 같은 채널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고 백화점 매장에 입점하기에는 브랜드 고유의 캐릭터를 고려한다면 맞지 않다.

코스메틱 뿐 아니라 다양한 카테고리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좋은 브랜드가 많다.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을 반영한 여러 제품들을 만들어 내던 것이 과거 패션 시장에만 국한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산업 전반에 걸쳐 같은 양상을 보이며 변화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잘 편집해서 보여줄 수 있는 중심적인 역할을 띵굴스토어가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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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리테일 비즈니스로 확장 계획이 궁금하다. 부동산 디벨로퍼에서 유통 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인가.

우선 정확한 개념 설명부터 하자면, 띵굴시장은 파워블로거 이혜선씨가 시작한 국내 최대 규모의 플리마켓이다. 우리가 그 곳에 투자하면서 ‘띵굴(Thin gool)’이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하고 있다. 좀 더 새롭고 달라진 띵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플랫폼을 우선적으로 선보이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해 오프라인 플랫폼 ‘띵굴스토어’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기존에 간헐적으로 진행되어오던 온라인 몰 역시 상시 운영 형태로 플랫폼화해 ‘띵굴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5월부터 선보이게 될 예정이다. ‘띵굴’의 브랜드 정립과 버전업의 시간을 보내면서 기존의 띵굴 시장(플리마켓)은 잠시 (리뉴얼)후순위로 두게 됐다. 하지만 띵굴 시장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띵굴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조금 더 보완 과정을 거쳐 지속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기존에 잘 유지해 운영됐던 가치 기반으로 많은 지역에서 고객들에게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형태로 운영하고자 재정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5월로 예정된 인천 송도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띵굴 시장을 기다려주시는 고객 분들을 찾아 뵐 예정이다.

리테일 시장이 온라인을 활용한 모델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오프라인 상 공간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고 보는가.

큐레이션 서점 아크앤북 사례를 꼽겠다. 해외에서 이미 서점들은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이다. 사고자 하는 책이 있다면 손가락 하나면 5분 내 간편하고 빠르게 주문할 수 있다. 주문자가 있는 장소로 혹은 주문자가 원하는 스토어를 방문하여 찾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프라인 서점으로 방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일본 서점 츠타야가 성공적인 사례다.

아크앤북 역시 큐레이션을 기반으로 일부러 책을 찾기 어렵게 만들어 놨다, 즉 아크앤북은 자기의 취향을 발견하거나 사려고 했던 책이 아닌, 직접 와서 발견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공간으로 구성한 곳이다.

책을 사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노출시키고 책을 체험 시키게 하는 결국 책에 대한 관심과 구매를 일으키게 하는 측면을 고민해 만든 공간이다. 어느 연구 결과에도 나와 있듯 책을 사서 읽지 않고 꽂아만 놓아도 지적 사고 능력이 상승한다고 한다.

전자책이 아닌 온전히 실체로서의 책 가치가 아직까지는 유효하다. 아크앤북은 그걸 꼭 알리고 싶어서 만든 공간이다. 이처럼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온라인 채널을 따라가기 보다는 오프라인으로 유입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고객의 니즈와 취향을 고려한 심층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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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복합문화 공간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가.

현재 성수연방 같은 규모의 복합문화공간 프로젝트 계힉은 없다. 올해는 아크앤북과 띵굴의 확장과 기업 내부의 힘을 다지는데 역량을 쏟기로 했다. 띵굴의 경우 단순히 온·오프라인으로 채널만 확장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동안 OTD가 쌓아온 공간 플랫폼 기획과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양함을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2월 말 오픈한 패션 중심의 구성한, 새로운 유형의 리테일형 롯데월드몰점이 첫 시작이다.

산업계는 밀레니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 파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프라인 상 공간에 대한 젊은 소비자 요구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현대인들의 일상은 ‘피로 사회’이기 때문에 소비 활동에 있어서도 피곤함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미 누군가의 검증과 필터링을 거친 상품을 원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가 바로 그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쇼핑몰에서 나의 구매 기록과 장바구니를 보고 나의 관심사에 맞게 큐레이션해 준 제품이나 가격 비교 사이트의 최상단의 제품을 구매하는 형태를 선호한다. 이제는 더 이상 기업의 일방향적 소통이 통하지 않는 취향이 중시되는 시대이다.

획일화된 상품 진열과 메시지로 강요하고 목적 구매 용도로만 접근하기보다 자연스러운 체험을 통한 더 나은 라이프스타일 제안함으로서 본인의 몰랐던 취향을 재발견하거나 만들어갈 수 있는 형태로 나아가야한다고 본다.


출처: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