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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하우스(Terrace House)’는 한 집에 6명의 젊은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본의 리얼리티쇼이다. 일본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조금 신경 쓰이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차피 돈은 넷플릭스에 내는 거니까!’라는 자위적 판단으로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자.
언뜻 생각해봐도, 이미 리얼리티쇼는 넘치고 넘쳐서 강아지나 고양이의 일상에, 연예인 매니져와 냉장고까지 살펴보는 시대에 궁금하지도 않은 외국의, 그것도 딱히 이색적일 것도 없는 옆 나라 일본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테라스 하우스는 벌써 5번째 시즌이 방송 중에 있고 세계적으로도 골수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넷플릭스의 장수 프로그램이다. 거기에는 응당 이유가 있을 것이다.
테라스 하우스는 굉장히 느리게 진행된다. 한 시즌이 짧게는 1년 정도, 길게는 1년 6개월 정도에 걸쳐 촬영된다. 6명의 젊은이들이 한 집에 입주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들은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 집을 떠날 수 있으며(이를 ‘졸업’이라 부른다), 자연스럽게 촬영기간 동안 15~2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테라스 하우스를 거쳐 가게 된다.
즉,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지막 에피소드의 입주자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연출이 아닌 진짜 리얼리티
이들은 모두 유명인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일본의 젊은이들로, 모두 자기 이야기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테라스 하우스에 살게 된 이후에도 자기 생활을 하게 된다. 테라스 하우스가 다른 ‘리얼리티쇼’와 다른 지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리얼리티쇼’라고 부르는 TV쇼들은 사실 리얼하지 않다. 하지만 테라스 하우스에 살고 있는 입주자들은 출근을 하고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고, 집에 돌아와 목욕도 하고 수다를 떨다가 졸기도 하고, 때로는 출장이나 여행을 떠나 한참 뒤에야 돌아오기도 한다. 그야말로 ‘리얼리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지독할 정도로 건조하고 객관적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선 테라스 하우스에는 자막이 없다.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쇼프로그램의 자막은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게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자막 삽입은 적극적인 제작자의 개입을 의미한다.
딱히 웃기지 않은 부분에서 웃고 있는 출연자 옆에 우스꽝스러운 폰트의 ‘하하하하!’ 라는 자막이나, 이미 입으로 말하고 있는 대사를 자막으로 다시 보여주거나 강조하고 싶은 단어에 다른 컬러를 입힌 자막을 보여줌으로써 ‘자, 이 부분은 조금 주목하도록 해봐’라는 식으로 보는이의 감정을 한쪽 방향으로 의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적절하게 사용했을 때의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시청자가 온전히 방송 자체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테라스 하우스에는 에피소드 초반에 잠시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 나이 등을 보여주는 짧은 자막과 테라스 하우스 밖에서 촬영이 이루어지는 경우 위치를 표시하는 자막 이외에는 어떤 자막도 삽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청자들은 온전히 자기감정에 의존하여 상황이나 출연자들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고 제각각의 해석을 하게 된다.
BGM 역시 매우 조심스럽고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어 필요 이상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고, 카메라 앵글 역시 좀 인이나 줌 아웃 없이 대단히 건조하고 느리게, 마치 시청자가 어딘가에 숨어서 집안을 마음껏 살피도록 움직인다.
즉 테라스 하우스는 집요하리만치 의도적으로 모든 디테일을 제작하는 쪽이 아닌, ‘보는 사람’의 눈과 귀에 맞춰놓은 셈이다.
물론 이 외에도 독특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나 컬러톤 처럼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많지만, 무엇보다도 테라스 하우스가 기존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차별화된 지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테라스 하우스는 일 방향적이 아닌, 쌍방향적인 쇼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테라스 하우스는 모든 촬영이 끝난 후에 방송이 시작되지 않고 촬영이 진행 중인 시점에서 약간의 텀을 두고 방송을 시작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이 프로그램은 무려 1년~1년 반 정도에 걸쳐 방영되는 프로그램이고, 입주자들은 모두 합숙을 하지도, 행동에 제한을 받지도 않는다.
그 결과, 에피소드 중간에 자기들끼리 테라스 하우스의 TV앞에 모여 앉아 1주일에 1회 방송되는 테라스 하우스를 직접 보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없는 자리에서 했던 다른 룸메이트의 험담이나 비밀스럽게 했던 고백들, 회사 동료들과 나눈 테라스 하우스 안에서 생긴 불평이나 그런 말을 내뱉던 순간의, 자신도 보지 못했던 본인의 표정을 완벽하게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방으로 지켜본다.
즉, 테라스 하우스의 출연자는 방송에 가담하는 제작자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본방을 사수하면서 TV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청자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눈치가 빠른 분들은 ‘쌍방향’의 의미를 눈치 채셨을 지도 모르겠다.
테라스 하우스는 쇼 프로그램이라기 보다 플랫폼에 가깝다. 즉, 방송에 참여하는 사람들(입주자)과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들(시청자)의 차이점을 없애버린 프로그램이다. 테라스 하우스에서 실제로 카메라를 설치하고 음악을 깔고 길고 긴 방송분량을 40분에 맞게 배치하는 실질적인 제작자의 냄새는 먼지만큼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출연자들은 아주 약간의 시간적인 텀을 두고 트위터나 커뮤니티를 통해 바로 얼마 전에 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그 피드백들은 이후 에피소드에서의 출연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초반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던 출연자가 어느 순간 엉뚱한 이유로 테라스 하우스를 떠나거나, 행동거지를 바꾸기도 하고, 대놓고 “방송이 나간 이후 너무 많은 악플에 시달려서 뭐를 잘못 했는지 깨닫게 되었어”라고 말한다.
경쟁관계였던 다른 룸메이트가 상처받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자신이 짓던 표정을 보고 스스로에게 정이 떨어졌다고 다른 출연자에게 참회하듯 말하기도 하며, 이 모든 것들 역시 방송에 그대로 내보내진다. 즉, 테라스 하우스는 출연진을 포함한, 이 TV쇼를 시청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인 셈이다. 시작점만이 주어진 채 모두가 참여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렇게 스토리가 완성되어가는, 일종의 RPG 게임 같은 리얼리티쇼이다.
사실 지금껏 모든 종류의 문화는 화살표 형태의 일방향적으로 발달해왔다. 한 쪽에는 화가, 소설가, 시인, 영화감독 같은 제작자(Producer)가 존재하고, 반대쪽에는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를 전달받는 대중(Receiver, 혹은 Consumer)이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벽이 늘 존재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체적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이 ‘시간의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음이다.
2016년 9월, 2017 S/S 컬렉션을 앞두고 버버리는 ‘See Now, Buy Now’를 공언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패션업계의 공식(6개월 앞서 디자인을 선 공개하는)을 무너뜨리고, 시즌과 관계없는 아이템들은 런웨이가 공개되는 순간부터 즉시 세계의 플래그쉽 스토어와 온라인몰을 통해 구매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조정한 것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가능한 이유는 인터넷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런웨이 스트리밍이 가능할 뿐 아니라 새 컬렉션의 아이템 하나하나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 수집이 가능하고, 전 세계 어디서든 온라인몰을 통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더더욱, 5G망을 통해 지금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데이터 전송이 가능해진다면 앞으로 점점 ‘시간이 필요한’ 분야의 벽들이 무너지게 될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는 직선형이었던 모든 문화의 전달 방향이, 입체형태로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형상과 언어체계처럼)
지금의 소비자들은 그저 주는 밥을 받아먹는 데는 관심이 없는 대신, 누구보다 열심히 구글맵과 네이버를 뒤져서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여행을 떠나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베이글을 파는 가게를 뒤지고 뒤져 기어코 비행기를 타고라도 가고야 마는 사람들이자, 한국에서 가장 저렴한 주유소를 찾아내고, 다른 이에게 경험담을 남기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즐겁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지상파 뉴스보다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공유되는 유튜브를, 수많은 ‘검증된’ 작가와 코미디언들이 공들여 만든 TV 코미디쇼 보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아프리카TV의 방송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BTS의 세계적인 흥행 이면에는, 훌륭한 음악 외에도 BTS멤버 개개인이 데뷔 이후로 지금까지도 팬들과 ‘스타’와 ‘팬’이라는 큰 벽을 허문 채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런 모든 사회의 현상들은 결국 테라스 하우스의 인기비결처럼, 문화가 점점 입체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들이지 않을까?
어쩌면 미래의 런웨이는 천재 디자이너가 제안하는 아방가르드하고 기괴한 예술적인 감성의 런웨이가 아니라, 유저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여느 MMORPG 게임 속의 마을 같아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집단지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런웨이가 천재 디자이너의 런웨이보다 훌륭할 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예술방면을 이끌었던 것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 민주적 집단지성이 아니라, 기존의 고정관념들을 뒤엎는 변종 아웃사이더들의 특이한 관점에 의해서였으니까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