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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영국 테이트미술관 큐레이터들은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리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예술가, 운동가, 문화단체 등 관계자 수백 명이 미술관 터바인홀에 모여 토론을 진행하고 2023년까지 탄소소비량을 10%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테이트 산하 4개 미술관과 각 미술관에 입점한 카페, 바 등 매장에서도 기후 변화를 방지하는데 동참하는 것은 물론, 예술을 통해 기후변화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그에 앞서 지난 5월, 이탈리아 베니스의 주택가에 마련된 한 전시장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몇 시간씩 줄을 서며 전시 관람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곳은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관이었는데요, 상설 전시관이 없어 대관으로 국가관 전시장을 마련하고도 최고 영예의 상을 거머쥔 리투아니아관의 주제는 ‘태양과 바다’(Sun & Sea)였습니다.
전시장 안에는 인공 해변이 조성됐습니다. 20여 명의 오페라 가수들이 하루 종일 ‘휴양객’을 연기하며 환경 재앙을 우려하는 레퀴엠을 불렀습니다.
기후 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점점 사라져가는 해변의 모습을 직관적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으로 보여주며 환경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관람객들은 2층에 마련된 객석에서 이들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곱씹었습니다.
가장 동시대적이면서도 세계 최고 권위를 내세우는 현대미술계와 건축계에서 지구의 지속가능성, 특히 ‘인류세(Anthropocene)’를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진지한 성찰과 담론이 시작됐습니다.
6번째 지구 대멸종이 시작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인류세’
올 해 초 우연히 보게 된 EBS 창사 특집 3부작 다큐멘터리 <인류세>에서 담은 세계적 석학들의 메시지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노벨화학상 수상자 폴 크뤼천(Paul Crutzen)이 지난 2000년에 처음 제시한 용어입니다. 폴 크뤼천은 당시 한 학회에서 지금의 지구가 이전과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며 지금은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인 ‘인류세’라고 주장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 지구에는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현재 우리는 지질학적으로 인류가 나타나기 시작한 약 1만 년 전 시작된 ‘홀로세’(Holocene)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간을 포함한 6번째 대멸종이 시작됐다며 새로운 지질연대를 스스로 일컫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950년대 이뤄진 핵실험과 플라스틱 등 인공물의 증가, 이산화탄소와 메탄 농도의 급증, 대기·수질·토양 오염 증가, 지구 온난화의 급격한 확대 등은 지구 시스템(Earth System) 전반에 빠른 속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직 인류세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지칭하는 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류세의 등장에 국제 사회가 주목하는 건, 인간의 잔혹한 미래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두서너 세대는 족히 지나야 온전히 이해가 가능한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그 속도는 점점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절박함 인 것이죠.
실제로 2009년 국제지질연합(IUGS) 산하의 국제층서위원회(ICS)는 인류세 연구를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인류세워킹그룹(AWG)’을 만들었습니다.
지난 5월 AWG는 20세기 중반을 인류세 시작으로 보자는 안을 통과시켰고 2021년에 국제층서위원회에 공식 제안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이미 학계를 넘어 산업 전반으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구글 트렌드로 검색어 순위를 확인해보면 해외에선 ‘4차 산업혁명’ 보다 ‘인류세’가 월등히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올해 EBS 다큐를 시작으로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아직 대중적인 관심은 미비한 것 같습니다.
일민 미술관에서 4개월 가까이 진행된 ‘Dear Amazon: 인류세 2019’나 세계 디자인계 ‘다보스포럼’을 지향하는 ‘헤럴드디자인포럼 2019’ 등 미술계의 토픽으로 소개되었을 뿐 정작 인류세의 주범으로 꼽히는 산업계의 체감온도는 매우 낮습니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을 많이 검색한 나라는 동남아 국가와 남아프리카공하국,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였습니다.
기술혁명이 초래한 불편한 진실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산업성장에 더 주목해왔죠. 이에 일부 학자들은 인류세를 인류세가 아닌 자본주의세라고 말해야 한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엄중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후 혼란이 세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도록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기후 재앙을 피하기 위해 경제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인가?”
나오미 클라인이 쓴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자본주의 대 기후’의 발제문입니다.
이젠 다음세대가 아닌 당장 우리 세대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절박함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마주하게 된 나오미 클라인이 던진 이 질문은 저희들에겐 매우 묵직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비지니스보다 우선이 될 수 없고 기업 본연의 목적은 ‘이익 추구’라고 배워왔습니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개인이면서 조직원인 사람들. 소비자이면서 기업을 대변해야하는 우리는 과연 환경과 사업 모두를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요.
‘지속가능성’ 담론…고정관념에서 탈피
특히 패션산업은 석유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산업이기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당면과제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청바지 한 벌을 생산하는 데 32.5kg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합니다.
이는 어린 소나무 11.7그루를 심어야 상쇄할 수 있는 수준이지요. 직조와 염색, 워싱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은 약 7000리터로 우리나라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잡을 때 5~6일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양입니다.
특히 패스트 패션 브랜드는 일주일마다 신상품을 쏟아내고 가성비를 앞세워 무분별한 소비 심리를 자극하죠. 그리고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이니 한 철 입을 생각으로 가볍게 사고 버리곤 합니다. 사실 이는 패스트 패션만의 문제만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역설적으로 기업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내구성이 강한 옷을 만들면 사람들은 자주 사지 않을 것입니다. 대물량에 의한 단기간의 매출을 기대하기 어렵겠죠.
노동 착취를 하지 않고 인권을 보호하며 공정을 까다롭게 할수록 단가는 올라갑니다. 브랜드 가치가 높지 않다면 가성비가 낮다고 외면 받기 십상입니다. 스타마케팅 보다 가치 있는 활동을 통한 지지기반으로 성장하겠다는 장기 계획을 세우면 영업팀과 위탁 매장 사업자들은 매우 불안해합니다.
언론 또한 마치 성적순으로 행복을 메기듯 관습적으로 판매율을 묻고 매출로 브랜드 서열을 세우는 것에 익숙해져있지요. 이런 내외부의 시선들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고 대응하기까지 기업의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매출 규모가 크고 조직원이 많을수록 개개인 모두와 동시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기에 집합적인 시선을 한 번에 바꾸기 힘든 구조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물결은 기술혁명을 타고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더욱 확산 될 것이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글로벌 브랜드들은 점점 그 세를 확장할 것입니다.
이제는 친환경을 넘어 소비하는 방식, 입는 방식, 경영하는 방식 등을 집합적으로 아우르며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전환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결국 ‘지속가능성’에 대한 담론은 기존의 모든 관습과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현대미술만큼이나 가장 동시대적인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산업이 가진 문화적 힘을 선한 영향력으로 발휘한다면 사업과 환경을 모두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