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를 매출로 판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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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복수전공으로 패션에 입문했던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한껏 부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서울 패션 위크’가 열리는 학여울역의 세텍(SETEC)을 찾았다. 모 디자이너의 런웨이는 처음 보는 입장에서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입장 티켓을 영화 한 편 티켓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는 것과,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어 휑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패션 분야는 전 세계를 기준으로 보자면,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셨을 여러 디자이너들과 관계자들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그야말로 ‘아웃 오브 안중’ 수준이었고, 국내만 놓고 보더라도 결코 세상 어디에 내놓을 만 한 콘텐츠나 뚜렷한 노선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수준으로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 되던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냉정한 평가일 것이다.

TV프로그램에서 시작된 패션 팬덤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한국 패션이 본격적으로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은 한 케이블 TV 채널을 통해 방영된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2009년부터 였던 것 같다.

이미 2004년 이후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미국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한국판으로 만들었던 이 프로그램은, 사실상 국내에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효시로 볼 수 있을 만큼 신선했다.

늘 비밀스러웠던 ‘패션’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했고, 이 프로그램의 성공과 함께 패션 모델들의 경쟁을 다룬,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역시 마니아층을 형성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패션’ 자체가 트렌드로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젝트 런웨이의 대성공은 결과적으로 산업의 지각 변동을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프로젝트 런웨이로 얼굴이 알려진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제도권 브랜드’에 식상해 하던 소비층을 공략한, 작지만 개성있는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약진이 이루어졌다.

그런 니즈를 공략한 편집매장들이 틈새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등 선순환이 발생했고, 프로젝트 런웨이와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의 대성공으로 유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많은 재능 있는 디자이너와 모델들의 얼굴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시장 하나가 개척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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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패션 창작 스튜디오의 시너지

때마침 서울시가 2009년 12월에 설립하고 운영하던 ‘서울 패션 창작 스튜디오’는 이런 흐름과 맞물려 큰 시너지를 발생시켰다.

서울시의 지원 하에 재능 있는 패션 디자이너를 인큐베이팅 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어 꾸준히 제 역할을 했고, 2012년 불어 닥친 서울패션센터 내부 비리 문제로 인한 폐쇄와 서울 패션 위크의 위기가 있었음에도 이미 만들어진 큰 흐름은 꺾이지 않았다.

TV 프로그램으로 인해 디자이너와 모델들은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 브랜드가 생겨났으며 ‘서울 패션 위크’는 썰렁하게 치러지던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고 즐길 거리도 많은, 일종의 축제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2012년부터 4개 시즌에 걸쳐 유랑 신세였던 서울 패션위크는 2014년 완공된 DDP에 자리 잡게 되면서 서울 패션 위크 자체의 흥행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서울시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행사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그럴 듯 해 졌고, 해외의 바이어들도 꾸준히 초청하면서 ‘세계 5대 패션 위크로 도약 하겠다’라는 모토까지 내세울 정도로 매우 활발하게 규모를 키워왔다. 어쩌면 전에 없던 한국 패션의 절정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2020 S/S Seoul Fashion Week

눈에 보이는 서울 패션 위크의 비약적인 질적, 양적인 발전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2016년경을 기점으로 주춤하게 되었고 이런 흐름이 2020 S/S 시즌 컬렉션이 발표된 지난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패션 위크 측의 자료에 따르면, 패션 위크의 전체 볼륨을 가늠할 수 있는 해외 수주 상담 실적은, 2016년 정점을 찍은 후, 2017년 크게 하락했다가 2018년부터는 다시 소폭 상승하여, 2019년 다시 2016년 수준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때마침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기 불황과도 맞물리며 전망이 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한창 패션 위크가 흥행 몰이를 하던 수 년 전과 비교할 때, 대중의 관심도도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떨어졌고, 행사장 분위기 역시 전에 비해 다소 힘이 빠져있음이 느껴진다.

대중음악, 음식문화, 영화, 스포츠 등 전체적인 한국 문화의 각종 콘텐츠들이 점점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독 패션 분야만큼은 제자리걸음 중인 셈이다.

분명히 투자는 계속 되고 있고, 관계자들이 나름대로 판을 키워 놓는데 까지는 성공을 했는데 실적이 제자리걸음이라면, 이제 문제는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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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패션위크만의 감성은 어디에

파리, 뉴욕, 밀라노, 런던에 도쿄, 바르셀로나 등 이른바 ‘잘나가는’ 세계의 패션 위크들은 모두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참가하는 브랜드들은 제각각이지만, 그 하나하나를 한데 모아두면 해당 도시와 잘 어울리는 어떤 상징적인 키워드로 묶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서울 패션 위크에서 서울 패션 위크 만의 감성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굳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서울 패션 위크의 모습은 세계 4대 패션 위크들을 모두 뒤섞어 놓은 것 같다.

트렌드를 빠르게 적용시키기는 하지만, 그 안에 맛깔스러운 자기 해석은 어딘가 빠져있는 듯한, 마치 비빔밥이기는 한데 고추장이 아니라 스리라챠 소스를 넣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언제나 서울 패션 위크는 특별함이 느껴지기 보다는 평범한 범작들을 모아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도 미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기생충’을 본 미국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그들이 기생충을 평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헐리웃의 문법과 너무나 다른 흐름이 신선하다”라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얼마든지 미국에서의 흥행을 위해 미국인들에게 잘 먹힐만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최근 헐리웃 영화의 트렌드인 PC코드(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를 집어넣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봉 감독은 철저히 지금껏 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의 방식대로 기생충을 완성했고, 이런 점들이 미국인들에게는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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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과 매출의 간극

원더걸스가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현지화를 위한 노력을 수 년 간 했음에도 열리지 않던 문이 싸이나 BTS에 의해 열렸던 과정 또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바이어들이 서울 패션 위크에서 바라는 것은,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르는, 비슷비슷한 디자인이 아니라, 어쩌면 서울 패션 위크에서만 볼 수 있는 디자인일 것이다.

지금부터 서울 패션 위크가 한 단계 뛰어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바이어를 끌어오거나, 지금 당장 잘 팔고 있는 브랜드를 인큐베이팅 할 것이 아니라, 자기 개성에 충실하고 자기 냄새를 낼 줄 아는 디자이너를 키워내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