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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은 국내 패션대기업들의 수난시대였다.
굴지의 패션대기업들이 줄줄이 매각 되거나 브랜드를 연이어 중단하는 사태가 매년 벌어졌다.
패션기업이 유통기업에 인수되거나 브랜드 중단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패션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지만, 최근의 상황은 예전과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패션기업들 내에서의 인수, 중단, 신규 론칭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들 브랜드의 DNA와 보유역량, 노하우가 축적된 결과물이기에 당연한 모습이었다. 패션기업들은 대략 세 가지 패턴으로 신규 브랜드를 진행했다.
첫 번째, 안정적인 시장이 예상되는 곳에 자금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자체 브랜드로 진출하거나, 또는 해외 브랜드를 도입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자사가 전개하다 중단한 상표권을 재런칭하는 방식(이 경우 중단전과 조닝이 동일하거나 바꾸기도 한다)이다.
세 번째, 콘셉트가 차별화되어 있고 브랜드 로열티가 있는 개인 브랜드나, 톡톡 튀는 개성을 가진 브랜드를 인수해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하는 방식이다.
이 외에 아이디어가 넘치는 ‘개인’이 재기 발랄한(컨셉, 유통, 바잉 등) 신규 브랜드를 만들어 깜짝 등장하거나, 거대 공룡 외국 브랜드가 국내로 직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신규 브랜드는 태어나고, 생명이 다한 브랜드나 더 이상 기업의 이익에 기여하지 못하는 브랜드, 혹은 존재 의미가 없는 브랜드들은 철수를 하면서 브랜드 생태계는 이어져왔다.
패션기업에서 유통기업으로 패권 이동
하지만 요즘은 브랜드 생태계의 주요 구성원이 ‘패션기업’이 아닌 ‘유통기업’이다. 유통기업 중에서도 백화점을 통해 패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롯데, 현대, 신세계가 그 중심이다. 이 국내 유통 기업들은 다양한 사업 다각화를 진행 중이다. 다각화의 일환 중 하나가 패션기업의 인수 또는 브랜드 론칭을 통한 패션산업 진출이다.
백화점 유통기업이 패션기업을 인수해 운영한다는 것은 양측 모두 큰 장점이 있다. 먼저 인수된 패션기업의 브랜드들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안정적인 자금력과 조직력을 꼽을 수 있다.
패션의 특성상 매출과 판매율이 좋을 때는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매출이 하락하거나 판매율이 낮을 때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더불어 재고 가치하락으로 미래의 손실은 더욱더 떨어지기 마련인 위험성이 큰 사업이다.
그렇다면 브랜드 가치지향적인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유통기업의 자금력과 조직력은 브랜드 성장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유통망 확보를 통해 볼륨화와 안정화, 수익성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패션기업 또는 브랜드들은 유통 확보가 최우선의 과제다.
양질의 유통 확보야말로 성장과 유지의 관건이므로 국내 브랜드들은 백화점의 유통으로 레버리지를 삼는 것이 중요하다. 1990~2000년대는 지방도시 가두점, 나들목 상권과 지방 쇼핑타운을 중심으로 유통의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지만 유통 3사가 백화점, 할인점, 아웃렛, 쇼핑몰 모두를 평정해버리고 온라인까지 진출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백화점의 도움이 절실하다.
세 번째, 백화점의 패션사업 진출 전략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백화점은 패션사업 진출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마일스톤, 세부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수되는 패션기업과 브랜드로써는 그 전략에 맞춰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럼 유통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장점이 있을까?
첫 번째, 유통 기업들은 유통 사업뿐 아니라 콘텐츠를 확보함으로써 영역을 넓혀 매출과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
출점할 수 있는 유통의 물리적인 숫자는 한계에 봉착했고, 백화점은 이미 실제로 성장율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할인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며, 아웃렛 유통은 확대되고 있지만 점당 성장은 정체이다.
유통 기업 입장에서의 장점
쇼핑몰은 계속 확대되겠지만 그것 역시 국내 시장의 사이즈를 볼 때 곧 한계에 달할 것이고 결국 기업 간 점유율 싸움으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동안 패션기업들이 가져갔던 콘텐츠 이익을 유통으로 가져오는 것이 이익과 매출을 확대시키는 방법이다.
두 번째, 유통기업들은 양질의 적절한 브랜드를 소유함으로써 유통 내 안정적인 브랜드 유지, 확보가 가능하다.
유통기업들이 브랜드 인수 경쟁을 하게 되면 타깃은 매출이 좋거나 가치가 높은 브랜드, 고객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들이다. 이런 브랜드를 타 유통에 놓쳤을 때에는 자사 유통 내에 전개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신세계는 스타필드 하남에 현대백화점의 한섬과 신경전 끝에 브랜드를 하나도 입점시키지 못했다.
이런 사례가 반복되지 않고 MD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브랜드 인수를 통해 안전장치를 확보함으로써 타 유통기업 대비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경쟁이 치열한 이커머스 시장에서도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 번째, 유통기업들은 브랜드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브랜드의 가치를 그대로 인수할 수 있다. 이는 유통에서 가질 수 없었던 패션 콘텐츠의 DNA를 수혈 받는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유통기업들이 교육에 대한 투자 마인드가 있다는 것이다.
기존 패션기업들은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교육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고 기본적인 투자만이 이루어졌다. 반면 유통기업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갖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진출하고자 하는 의욕뿐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학습하려는 의지 또한 강하다.
심지어 패션기업보다 더 패션분야에 대해 기초부터 심화까지 세분화하고 개별 맞춤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심지어 제조업 수준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 패션기업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이렇듯 교육에 대해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유통기업이 국내 패션의 역량을 올려놓으리라는 것은 매우 자명하고 향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이제 유통기업은 단순히 유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콘텐츠까지도 보유함으로써 유통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통기업의 패션기업과 브랜드 인수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부분만 있을까? 모든 것에 좋은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패션산업의 다양성 저하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고 그 효과에 대해 종합적으로 검증해봐야 한다.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패션산업의 다양성 측면이다. 패션사업이라 함은 본디 크리에이티브한 감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경쟁하며 서로 충돌하고 그 가운데 새로운 것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발전하고 변주해가는 사업 분야다.
경제상황과 소비 경기가 안 좋은 현재에는 새로운 패션기업이나 브랜드의 출현이 매우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패션기업과 브랜드가 유통기업에게 인수되어 재편되고 축약되고 있다. 양적인 증가가 반드시 질적인 성장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양한 패션기업의 양적인 감소와 축소는 충분히 우려할 만하다.
패션기업과 브랜드가 유통기업에 인수되는 경우에 계속 유지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너무 많은 브랜드가 소수의 유통기업에게 종속되는 것 또한 다양성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생명력 있고 생동감 있는 다양한 패션기업들이 사라지고, 소수의 거대 유통기업들에게 의해 운영되는 브랜드들과 종속 기업들만이 남아있는 국내 패션산업의 획일화된 모습은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한섬과 톰보이의 사례에서 보듯이 유통기업의 패션기업 인수는 재무적인 측면에서 큰 성과를 보여주었다. 브랜드의 가치가 기업의 정교한 매니지먼트 능력과 함께 시너지를 일으켜 큰 이익을 냈고, 이는 패션과 유통의 조합을 통한 성공이라는 신화를 쓰기에 충분했다. 이는 앞으로 이와 같은 형태의 유통과 콘텐츠 결합의 기업구조 모델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한섬의 브랜드 가치가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가? 패션을 선도하는 국내 최고 브랜드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지켜지고 있는가? 앞으로도 계속 국내 패션을 리드하는 혁신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 동안 쌓아왔던 브랜드 가치를 현대백화점이 조직적이고 시스템적인 경영을 통해 과실만을 취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비평도 있다. 현대백화점 인수 이전의 한섬이 보여주었던, 한국 패션을 선도했던 차별화된 문화와 가치, 혁신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현대백화점과 한섬의 사례는 시너지냐 소진이냐를 두고 아직은 좀 더 지켜본 뒤 결론을 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경영상의 수치를 놓고 볼 때 확실한 것은 유통 기업 피인수를 통해 인수된 패션브랜드는 날개를 달았고 화려한 약진을 하였다.
이 결과를 본 다른 유통기업들도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것이라 예측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당분간 이러한 추세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인수에 참여하는 유통기업도 백화점 뿐 아니라 다양한 유통기업들로 확대될 것이다.
수익 안 나면 언제든지 매각
두 번째는 패션브랜드의 지속성 여부이다. 패션기업들이 갖고 있는 노하우와 내재된 DNA가 유통기업에 잘 접목되어서 새로운 생명체로 재탄생 할 수 있느냐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만일 서로간의 융합이나 접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로 끝난다면 패션산업의 정체 혹은 퇴보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기업은 매출과 손익의 필요에 의해 인수합병을 진행하지만 이 논리는 반대의 경우도 똑같이 적용된다. 패션기업과 브랜드가 손익이 나지 않거나 효율이 떨어진다면 언제든 매각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브랜드 DNA와 축적된 노하우는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효율과 손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LVMH의 사례에서 보듯이 수많은 명품들을 인수했어도 전통과 가치제고보다는 손익과 효율이 여전히 기업 운영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기업의 생리다. 명품의 공격적인 유통망 확대와 중국시장 전개 등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오너가 시작부터 직접 모든 것을 일구었거나, 아니면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온 브랜드는 손익과 효율보다 명예와 전통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깃들어 있다. 오너는 비록 어렵더라도 경영의 논리만으로 매각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 브랜드가 지속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어떻게 일관성을 유지할 것이냐, DNA를 어떻게 심어 고객들에게 각인시키느냐가 주요 관심사이다. 하지만 유통기업의 전문경영인이 브랜드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너가 운영하는 패션기업과 브랜드는 그것과 다를 수 있다.
유통기업이 패션기업 혹은 브랜드를 인수한 후에는 브랜드의 오너쉽이 자리 잡아야 한다. 패션은 단순히 소비하는 대상, 수익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을 흔들며 정체성을 표현하고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로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패션’은 우리의 정서와 문화이다.
이 부분은 손익의 판단만이 아닌 경영자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패션경영인이 있어야 한국 패션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
독과점의 문제
세 번째는 유통의 콘텐츠 점유 비율의 문제이다.
유통이 자사 패션 콘텐츠를 확대하는 것은 일정 부분까지는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율과 범위는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이랜드리테일의 사례에서 그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이랜드리테일은 이랜드가 보유한 브랜드만으로도 점포를 거의 채울 수 있다. 이것은 그룹사 전체로 본다면 매출, 이익, 운영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랜드 유통의 콘텐츠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로도 작용한다.
자사 유통에 자사 브랜드가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유통에도 브랜드에도 모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유통은 다른 브랜드를 유치할 수 없고, 유통의 브랜드는 다른 유통에 진출할 수 없다.
다양성이 떨어지고 고객에게 선택권을 줄 수 없는 유통은 의미가 없다. 상호간의 시너지가 단숨에 상호 몰락으로 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통기업이 손익과 시너지,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콘텐츠 점유비율을 찾아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 유통기업의 패션기업과 브랜드 인수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것을 통해 유통기업의 패션산업 다각화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어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지, 그리고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유통기업의 패션기업과 브랜드 인수를 통한 다각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패션기업과 패션전문가만이 브랜드를 론칭하고 운영하는 시대가 아니다. 다양한 플레이어가 패션산업에 들어와서 경쟁하고 있다.
패션기업도 유통기업도 개인 패션 브랜드도 모두 패션산업 생태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상황에 최적화하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유통기업이 더욱 적극적으로 패션브랜드를 전개하고 패션 비즈니스의 영역을 확장하길 기대한다. 그 기대는 유통기업들이 한국의 패션산업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고 풍성한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패션이 글로벌 무대에서 주역이 되길 희망한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