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다양성 속에 다시 시작되는 ‘남자들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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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패션 시장은 혼돈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지금의 ‘멋진 남성복’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려해도 딱히 분명하게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없다. 워낙 맥락도, 체계도, 역사도 다른 것들이 한데 뒤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각자 다른 것을 손에 쥐고, 열심히 밀고 나아가고 있어 소비자들의 취향도 다들 제각각이다.

성별 분리의 불필요성

특히 남성복의 경우 보통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멋진 옷이라는 자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다. 한동안은 사토리얼리스트, 테일러드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잘 만들어진 제품, 착장 규칙을 준수하는 일과 그 규격 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불어넣는 일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긴장감과 유머는, 분명 옷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도 유난히 우아하고 진중한 작업 중 하나다.

하지만 지나친 엄격성과 이런 옷이 담고 있는 분명한 성별 역할 분담은 확실히 지금 시대의 정신과 그렇게 들어맞아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영국과 이태리 혹은 미국 동부 어딘가의 룩에서 힌트와 영감을 찾고 있는 멋진 남성들이 있긴 하겠지만 고리타분함과 멋짐 사이의 균형 잡기는 예전에 비해 훨씬 난도가 높아져 있는 상태다.

또 스트리트웨어도 있다. 테일러링의 방식과 정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계열은 맞춤의 개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산품의 개성화를 만들어 냈다.

힙합 패션 같은 서브 컬쳐의 성장과 일상복의 패션화를 통해 이제는 완전히 메인스트림을 장악하고 있다. 이는 형식을 거부하고 개인을 중심에 두는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하다. 오버사이즈 후디나 투박한 스니커즈가 패셔너블한 모습으로 대접 받는다.

최근에는 환경 문제가 급격히 부각되고 있다. 리사이클 소재, 빈티지 옷 등 많은 방식들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고 이것들은 앞으로 패션에 밀접하게 결합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일부러 환경을 탕진하는 스타일의 패션은, 마치 모피가 그래왔던 것처럼 비난 받을지 모른다.

<보터(botter)>

<보터(botter)>

패션에 우열은 없다. 소재가 좋아야 한다, 만듦새가 좋아야 한다, 같은 조건들은 옷과 패션이 가진 요소의 일부일 뿐이다. 튀거나 편한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이런 문제는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견고한 영국식 옥스포드 구두와 나이키 운동화 중 어느 쪽이 좋은 신발이냐고 묻는다면 용도에 따라 다르다는 대답 말고 뭐가 있을까. 패션은 고행이 아니다.

사실 혼돈이라고 더 크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예전부터 남성 패션은 여성 패션에 비해 상당히 단순했기 때문이다. 훨씬 다양한 아이템과 장르가 있고 그 덕분에 매 시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여성복 패션과 비교할 게 아니다. 물론 그런 만큼 소재나 핏이 조금만 달라져도 눈에 확 띄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미묘함이 남성복의 매력 중 하나로 여겨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것들이 공존한다. 최근 멋진 남성의 옷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들은 꽤나 극적으로 반대편에 존재해 있는데 이 둘은 회사 등에 적을 두고 있는 현대 남성들 입장에서는 한 쪽은 회사용 옷 혹은 사회적인 옷 또 다른 한 쪽은 퇴근 후 옷, 가정의 옷이라는 식으로 이미 분리가 되어 있다. 캐주얼 프라이데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은 어지간하면 합쳐지지 않는다.

패션의 다양성은 더 넓어져

물론 여전히 포멀 웨어나 아웃도어 등 어떤 하나의 룩 만이 패셔너블하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있다. 또한 수많은 서브 컬쳐 안에 스킨헤드, 펑크, 뉴웨이브, 히피, 라이더 등등은 살아있고 그냥 그 안에 안주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들이 더 깊게 파고 들어갈수록 패션의 다양성은 더 크고 넓어지는 혜택이 생겨난다.

다양성, 각자 도생이 스타일리시의 또 다른 방식이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트랜드 천착도, 인기 있는 브랜드 파워는 더 높아지는 모순 속에 있다. 남성 패션 잡지를 따라가기만 하면 얼추 ‘옷 못 입다’ 소리는 듣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녹록지 않다.

세상의 변화를 여전히 트렌드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로 큐레이팅 기능이 무의미해져버린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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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오니(brioni)>

역사적으로 보자면 한 세대의 워크웨어가 다음 세대에는 패셔너블한 아이템이 되는 경우가 많다. 기능성은 더 나은 소재의 등장으로 의미가 퇴색하지만 오랫동안 있었다는 헤리티지 그리고 기능을 만들어 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거기에 남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 대전을 전후로 등장한 많은 군복이 그랬고, 버버리의 발마칸 코트, 필슨의 매키너 울, 바버의 왁시드 재킷 등도 그런 길을 걸었다.

이 중에서 점잖게 생긴 것들은 비즈니스 웨어에 편입되기도 하고 편안한 것들은 일상복이나 이지 스트리트웨어에 편입된다. 이제와 비가 내린다고 매킨토시의 맥 코트를 입고 나서는 것이 가능이야 하겠지만 이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우산도 있고 고어텍스 비옷 등 훨씬 좋은 제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가 변화 주도

이 와중에 뉴 포멀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있다. 아직 뚜렷한 모습이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포멀 웨어는 스트리트 등 캐주얼의 패러다임을 거친 후 다른 모습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편안하면서도 엘레강스를 잃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기 위해 최근 많은 남성복 디자이너들이 실험과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치마나 레이스처럼 여성 전용으로 인식되던 것들을 남성복에 도입하거나 아예 성별을 섞은 젠더리스 패션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멋지거나 별로거나 이런 기준은 의미가 사라진 걸까. 물론 아니다. 기준점을 찾아본다면 옷의 모습보다, 삶에 대한 태도 보다, 이상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이러 이러한 이유로 저런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의 노출이 많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큰 울림을 만들어 낸다.

결국 이렇게 뚜렷하고 명백한 길이 보이지 않는 혼돈에 빠진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사회와 개인 양쪽 모두 그런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각자 가지고 있는 다양성들이 옷을 통해 표현될 일이 많아졌고, 그 만큼 세상에는 간단히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다양한 ‘멋짐’이 존재하게 되었다.

남성복은 클래식은 클래식대로, 테크니컬 웨어는 또 그것대로 분화하고 결합하며 더 많은 카테고리를 만들어 내며 새로운 패션을 계속 제시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외적인 것들이 패션 디자이너들의 실험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본격적인 사회의 변화라는 세계적인 흐름과 함께 하고 있다. 깊고도 넓은 세상을 향한 남성 패션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출처 : 패션포스트 / www.fpost.co.kr